매거진 커피일기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몰랐던 것들

오늘의 커피

by 아무

오랜만에 세미가 왔고,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고, 오랜만에 책을 펼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반복되던 익숙한 나의 오전 일상이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셋의 조합, 셋을 한꺼번에 만난 건 참 오랜만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다그치는 못난 성격 탓에 일이 몰렸고 과부하 덕분에 책을 쉬이 읽지 못한 지 수개월째다. 좋은 책을 못 만나서 읽을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좋은 책일지라도 지금같이 산만한 시기에는 뭐든 곱씹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볍디가벼운 글을 흘러가듯 읽었고 그저 흘려보내 버렸다. 역류성 인후염과 늘어난 업무, 체력 저하, 독감으로 커피에 대한 나의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커피를 준비하는 시간과 입안에 머금은 따끈한 한 모금의 소중함이 좋았는데, 몸과 마음의 여유가 줄어드니 미묘한 향의 차이를 느낄 수 없어졌고 무엇보다 속이 쓰려 더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즐겁지 않아 졌다.

반려견 세미와의 이별은 내 의지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독립한 듯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된 지 만 1년이 되었다. 이전에도 자취 경험이 있지만 지금 홀로 보내는 이 시간은 이전과 다르다. 예전엔 젊음과 열정으로 활기찬 에너지와 함께했다면, 지금은 업무-휴식-업무-휴식이 전부인 단순화된 루틴으로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건 나 말고 챙겨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거라 그만큼 책임감과 해야 할 일도 늘어 요즘 같은 생활 패턴에는 언감생심. 내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데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없어 부모님 댁에 보냈더니 웃을 일이 없다. 삶의 질이 가라앉고 있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밤 산책을 했다. 혼자 살 게 된 후 산책이 즐겁지가 않아 퇴근 후엔 바로 집으로 왔다. 홀로 걷는 산책은 쓸쓸함이 더해져 그 시간에 머리를 돌려 ‘투 두 리스트’를 만들고 일의 순서를 정하고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비어있는 시간을 가만두지 않고 가열차게 가동시켰다. 반려견과 함께 살 땐 매일 산책이 필수였다. 그땐 그렇게도 귀찮디귀찮은 일이었는데 세미가 없으니 짧은 산책도 즐기지 않게 되고 더욱 고립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콜롬비아 수프리모 원두를 꺼내 뜸을 들이고 조금씩 물을 내려 커피빵을 만들고,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위즈덤하우스, 2017)’를 펼쳤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강렬하게 몰입하며 읽는 책으로 이승우 작가가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좋다. 책이 좋아 작가까지 궁금해졌고, 덕분에 오랜만에 책 읽기가 즐거워졌다. 그리고 너무 쓰거나 시지 않은 적당한 바디감의 콜롬비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낮잠 자는 반려견 옆에서 커피와 책을 즐기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오랜만에 마신 커피 덕에 속은 편치 않지만, 할 일을 쌓아두고 읽는 책이 마냥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 자주 함께할 수 없는 점점 늙어가는 반려견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지만, 오랜만에 1년 전 나의 일상이 그리워졌다. 그때도 지금처럼 행복했을까? 내 그릇의 크기를 알고 채운만큼 덜어내며 무게를 지켜야 하건만 요즘의 나는 내게 벌어지는 상황들을 그저 맞이하고 있다.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든 그저 다가오는 것이든 모두 오롯이 받아내고 있자니 점점 흐르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정하지 못하니 선택의 우선순위가 사라졌고 진짜 의미를 잃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그저 살아내는 시기를 보내는 요즘, 오랜만에 좋아하던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만난 기쁨이 크다. 내겐 이런 소소함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소소한 즐거움을 기억하고 찾아내야 내 일상을 편안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누가 해줄 수 없는 내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들.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놓치고 있던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