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없이 되는 건 없다. 새로운 재미를 느끼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도전하는 시기에는 뭐든 시도하면 그만이었다. 한참 즐기다가 힘들면 멈췄다가 쉬었다가도 상관없었다. 두렵지 않았다. 그저 좋을 대로 내키는 대로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지금 내게 주어진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임무 같은 것들이 늘어나면서 계획 없이 순서 없이 쳐내기 어려워졌다. 끝과 시작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엉켜버렸다. 잠깐 방심하면 흐름을 잃어 흔들리게 된다. 놓치고 흔들리면 좀 어떤가 싶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유지하려면 버텨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 잃게 될 것 같아 겁이 난다. 나는 더 이상 일탈을 꿈꾸지 않는다. 지켜내야 할 무게를 버티기에도 벅차기에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책임이라는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후 부터 ‘지켜내기' 위해 에너지를 모은다. 건강, 재산, 지위, 행복, 관계 등등등. 새로운 것을 쟁취하는 것보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가 더 힘겹고 버겁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한동안 커피가 끌리지 않는 시기를 보내다가 어제에 이어 오늘 아침도 커피 한 잔을 준비했다. 나만의 루틴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서. 원두를 꺼내어 핸드밀에 넣고 약간의 힘을 더하여 분쇄한 후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드리퍼에 내린다. 캡슐이나 인스턴트 제품 등 더 쉽고 간단하게 맛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다소 귀찮은 고전적인 방식을 고수해온 건 단순 반복하는 소소한 움직임이 오늘 하루를 위한 준비운동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쟁을 앞둔 군인이 총탄을 다시 한번 점검하듯 하루를 시작하기 전 예열 과정을 거쳐야만 오늘 펼쳐질 수많은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긴장과 부담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동안 멈춰있던 오래전 루틴을 꺼내보았다. 커피 전문점에서 맛 좋은 한 잔을 사 먹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겠지만, 남이 아닌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약간의 시간과 노력을 더하면 마음가짐도 좀 더 견고해진 달까. 하루 중 내가 나만을 위해 온전히 노력하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출근 전 20분, 나를 위한 시간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더욱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한다.
어젯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비하기 위해 손소독제와 마스크를 주문하려고 검색을 하던 찰나 끊임없이 ‘일시 품절’ 되는 상품을 보며 한 시간 이상을 쇼핑에 허비했다.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 알짜배기가 무엇 일지에 대한 고민, 더욱 싼 제품을 찾고 싶은 욕심 등 지금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걱정이 욕심으로 탈바꿈하여 마스크 50장 쇼핑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원하는 제품을 찾아 장바구니에 넣으면 일시 품절되고, 다른 사이트를 또 검색하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얇은 것, KF-80, KF-94, 면, 부직포, 색상과 디자인 등 선택에 대한 고민도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괜찮은 제품을 찾으려 고심했다. 얼마만큼 걱정해야 하고, 얼마만큼 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불안감만 더해질 뿐이고, 고작 마스크 따위가 바이러스로부터 건강을 지켜줄지 의문이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쇼핑을 해냈다. 어젯밤에 주문한 마스크는 오늘 오전, 벌써 준비되었고 배송 출발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런 지킴이 과민한 건지, 당연한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그저 묵묵히 오늘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내게 커피는 그런 의미다. 어제만큼 오늘도 힘들겠지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잘 버티고 나면 내일 아침에도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나의 의지대로 해결 가능한 일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무기력이 반복된다. 이 정도의 소소한 행위가 내게 활력을 가져다준다면 커피 한 잔을 아름답게 마실 수 있는 환경과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야겠다. 이 시간을 유지하기 위한 루틴을 확보해야 한다. 내게 커피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을 버틸 수 있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