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수가 끌리는 이유
학창 시절,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을 추억할만한 기억은 거의 없다. 매일 짜여진 계획대로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느라 새로운 친구를 사귈 여유도 없었다. 옆자리 짝꿍, 앞, 뒤에 앉은 친구들과 문제 풀이에 대한 질문, 지난 시간 숙제 등의 이야기 정도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 시절 우리의 유일한 휴식 시간은 점심시간이었고, 점심을 같이 먹으며 전투애를 다지곤 했다.
앞자리였나, 뒷자리였나, 한 친구의 특별한 물을 기억한다. 보통 사람들이 마시는 보리차, 결명자차, 옥수수차가 아닌 은은하게 풍기는 꽃 향과 투명한 수색, 난생처음 보는 그 물이 신기했다.
“이건 무슨 물이야?”
“엄마가 좋아하는 거라 매일 준비해주시는데 나도 잘 몰라.”
너무 당연하게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던 친구의 말투와 표정을 기억한다. 그 친구는 사용하는 연필도 공책도 남달랐다. 그 시절 우리들이 이용하는 아트박스나 헤이데이 같은 팬시점에서 본 적이 없는 감각적인 디자인의 필기도구들. 그 역시 어머니의 취향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고, 지금 생각해보니 외국에서 사 온 게 아닐까 싶다. 앞뒤로 앉은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고, 친구는 가끔 자신의 물을 나눠주었다. 내 것은 언제나 보리차나 결명자차였는데, 맛 좋은 물을 나눠주는 그 친구가 좋았다. 녹차나 재스민 차처럼 이미 알고 있는 달면서 쓴맛이 아닌 생전 처음 마셔보는 맛이라 더욱 신기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때문인지 맛있는 물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가지고 있다. 콜라 사이다, 주스 같은 ‘강한 자극이 있는 맛’의 음료보다 허브차나 탄산수처럼 ‘조금 다른 물맛’을 좋아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건강한 식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차를 즐겨 마시지만, 사실 내 관심은 ‘건강’이라기보다는 ‘맛있는 물’이다. 요즘은 ‘다도’ 같은 차 문화도 대중화되었고 유럽이나 홍콩의 유명한 차 브랜드만 취급하는 찻집이나 생과일주스, 밀크티 등 특정 음료 전문점이 많지만, 그 시절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아이스베리와 레드 망고 같은 아이스크림 가게와 커피숍이 전부였다. 커피숍에서 커피가 아닌 차를 마시는 건 눈에 튀는 행동이었다. 대부분이 선택하는 커피가 아니라 티백 하나 넣어주는 게 전부인, 아무 맛도 없는 차를 마시는 나는 ‘조금 유별난 아이’였다.
지금껏 경험해본 기성 차 중에서 가장 좋은 차로 기억하는 건 레볼루션의 ‘백차(white pear tea)’다. 백차는 차의 어린싹을 따서 그대로 건조시켜 만드는 가장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차의 한 종류이다. 특별한 공정을 거치지 않아서 어린잎의 솜털이 그대로 남아있어 은색의 광택을 볼 수 있다. 수색은 연한 편이고 맛은 부드럽고 순하다. 백차에 배향이 살짝 첨가된 백배 차(white pear tea)는 향긋함이 더해져 초보자가 마시기에 편안한 차이기도 하다.
고3 때 친구로부터 얻어먹었던 그 맛과 가장 유사한 레볼루션의 백차를 오랫동안 즐겨 마셨다. 씁쓸하고 텁텁한 홍차나 녹차와 달리 부드러운 목 넘김, 향기로운 백차를 파는 커피숍은 카페베네가 유일했다. 하지만 수요가 적었는지 이윤상의 이유인지 자체 브랜드의 차로 대체되면서 메뉴에서 사라졌고, 그 후로 백차를 마실 수 없었다. 카페베네가 문을 닫으면서 백차에 대한 기억도 잊혀졌다.
2017년 겨울,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괜찮은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전까지 내게 커피는 ‘어른 흉내 내고 싶은 사람들이나 마시는 쓰디쓴 물’에 불과했다. 교토의 3대 커피라고 불리는 이노다 커피에 다녀왔는데, 깊고 진한 풍미가 꽤 괜찮게 느껴졌다. 공간과 분위기, 음료 모두가 어우러진 모습이 커피의 맛으로 함께 기억되었다. ‘이런 향과 맛의 커피가 좋다.’ 같은 기준도 생겼다. 프랜차이즈 커피도 각자 고유한 맛과 향이 있고, 동네의 작은 커피숍에도 맛있는 커피를 판다는 것, 같은 원두를 사용해도 관리 방법, 추출 방식과 도구, 어떤 사람이 만드는지에 따라 여러 변수가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특정 지역의 원두나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보다는 새로운 맛을 찾아가는 재미가 생겼다.
취향이라는 것
‘이것이 나의 취향이다.’라고 점점 더 이야기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나만의 고유한 취향 같은 게 원래 있었나.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들을 따라 하면서 좋아지는 것을 하나씩 추가하고, 별로인 것을 덜어내면서 만들어지는 것, 그런 게 취향이라면 남과 다른 나만의 취향 같은 게 존재하긴 하는 건가. 최상의 것을 경험하고 난 후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견디는 게 좋은지, 애초부터 잡다한 관심을 끄고 보통의 입맛을 유지하는 게 좋은 건지. 매일 매 순간 최상을 누릴 수는 없으니까 선택을 위한 고민을 한다. 일이 줄어드니 쓸데없는 고민도 늘었다.
어젯밤엔 탄산수였다. 맥주를 마시기엔 부담스러웠고, 한밤중에 주전부리를 먹기도 애매했다. 탄산수를 사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동네 편의점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2+1로 팔던 탄산수가 어젯밤에는 할인 없이 정가 그대로 판매되고 있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나, 지금 이 답답함을 사소한 마실 거리로 풀고 싶은 마음, 다들 그랬나 보다. 뭐든 조금씩 후련해졌으면.
어제 사 온 탄산수 한 병을 꺼내 들었다. 내 취향의 산펠레그리노는 비싸니까 대체품으로 사 온 국내 탄산수는 100% 만족스럽지 않다. 탄산이 약하고 금세 김이 빠진다. 물맛도 영 별로다. 하긴 요즘 같은 시기에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게 있을까. 적당한 목의 따가움을 즐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이 탓, 건강 탓, 상황 탓, 경제 탓하기에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마시고, 읽고, 쓸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