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시선이 닿은 사무실 한켠에 디퓨저가 놓여있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환기를 위해 창문과 문을 전부 열어두느라, 마스크 세상에 살면서 존재 자체를 잊고 지내던 녀석이었다.
'내 공간에도 향기가 함께 하고 있었구나.'
지난가을 무렵 일하는 공간을 향기롭게 만들고 싶어 동대문 방산시장에서 디퓨저를 구입해왔다. 좋은 향을 찾기 위해 여러 종류의 향기를 맡으며 오랜 고민 끝에 스위스제 '트로픽 크리스탈 향'을 선택했다. 여름철 즐겨먹는 과일향 쭈쭈바를 떠올리게 하는 상큼 발랄한 트로피컬 향기로 아래로 가라앉는 나의 기운을 조금이나마 위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남들에게도 좋은 향이 되길 바라지만, 내게 부족한 기운을 채우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향기를 추억하다.
입시 미술학원을 처음 다니기 시작하던 중학교 2학년 시절, 중학생 담당 수채화 선생님에게서 은은하고 멋진 향기가 났다. 대학교에 다니는 건 특별한 일이라며, 자유로운 대학생활 이야기를 전해주던 그 선생님, 멋진 대학생의 이미지를 내게 전해주던 선생님을 대학에서 다시 만났다. 선생님이 다니던 대학에 내가 입학하게 된 것이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다시 만난 선생님, 이제는 조교 언니가 된 선배님에게서 진하고 묵직한 어른의 향기가 풍겼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풋내기 성인은 알 수 없는 어른의 향기였다. 선배님처럼 나도 나만의 멋진 향기를 갖고 싶었다.
향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향기는 알코올의 순도, 향료의 농도, 지속시간 등에 따라 퍼퓸[perfume], 오 드 퍼퓸[eau de perfume], 오드 뚜왈렛[eau de toilette], 오데 코롱[eau de cologne]으로 나뉜다. 발향 단계에 따라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로 나뉘며 어느 곳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지속력이나 발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내게 어울리는 향수를 찾고 싶었다. ‘향수 뿌렸다’를 과하게 티 내지 않고, 향기로운 꽃향이면서 가볍지 않고, 샴푸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겨야 하며, 흔하지 않은 것. 첫 향과 잔향까지도 괜찮은 나만의 향수를 갖고 싶었다. 20대 초반, 명동에 있는 여러 대형 화장품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향수의 세계를 탐험했다. 가장 처음 즐겨 사용하던 건 크리스찬 디올의 '포에버 앤 에버'이다. 흔하지 않은 샴푸 냄새 같았던 포에버 앤 에버는 나의 대학 생활의 동반자였다. 프리지어 꽃향기 같기도 하고 백합향 같기도 한 플로럴 계열의 오드 뚜왈렛으로 농도와 지속력은 약했지만, 잔향까지도 우아하고 청순한 느낌이 나는 향수이다. 청순한 향기로움, 나는 그 향기를 닮고 싶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샤넬의 코코 마드모아젤이다. 오리엔탈 우디 엠버 계열의 묵직함이 매력적인 향수이다. 묵직하기만 하면 답답할 텐데 시트러스의 발랄함과 은은한 꽃 향이 더해져 여성스러운 기품이 느껴진다. 오드 퍼퓸답게 지속력이 긴 편인데 은은한 파우더 잔향이 남아 부드럽고 성숙한 느낌이 난다. 코코 마드모아젤은 조교 언니이자 수채화 선생님에게서 풍기던 그 향기와 닮아있다. 그래서 코코 마드모아젤은 당당한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고 싶을 때 뿌린다. 강렬한 향기로 나를 무장하여 나약함을 감추고 싶을 때 뿌리면 효과가 좋다. 쓸만한 창과 방패를 가진 기분이다.
요즘은 향수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특정 향기로 이미지메이킹 하고 싶다기보다는 좋은 순간을 향기로 추억하고 싶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침을 흘리는 강아지처럼 좋았던 순간들을 연결 짓는 행위가 즐겁다. 좋은 향기를 맡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던 기억을 특정 향기와 특정 사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좋았던 순간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 소유한 향기들은 닮아있다. 자연의 향이거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기이다.
요가원에서 수련 중에 공간에 땀 냄새가 가득 차거나 사바 아사나(Shava-asana, 송장 자세)를 할 때면 에너지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공기 정화를 위해서 선생님께서 룸 스프레이를 뿌려주시곤 했다. 솔잎 향 같기도 하고, 유칼립투스 같기도 한 그 냄새는 내게 ‘요가=향기’로 기억되었다. 여느 향수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냄새는 아니지만, 내게 그 향은 명상과 호흡을 통해 마음이 편안해진 순간이 연상된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향기는 6번 차크라와 관련된 향이었다. 차크라는 육체, 정신,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운인데, 기운을 북돋아주는 향기와 함께 수련하면 수련이 배가 된다고 하여 요가원 선생님들이 수업 때 사용하는 향기이다. 그때 수련을 하는 나의 기운이 좋았기에 6번 차크라의 향이 좋은 느낌으로 각인되었나 보다. 지금도 이 스프레이를 사용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차크라나 향과 관련된 전문 용어 따위 몰라도 마음이 편한 순간, 내가 가장 행복한 때를 찾아가고 있었다. 향기와 마음을 연결 짓는 행위, 마음과 몸과 정신의 에너지를 모아 행복해지는 것, 향기를 갖고 싶던 이유를 알아냈다. 정답을 헷갈리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낸 기분이다.
손 씻기의 즐거움
요즘은 코와 입을 막고 있으니 집 밖에서 냄새 맡을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체취뿐이다. 자연스레 향수와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고, 디퓨저나 룸 스프레이, 캔들 같은 관심도 줄어들었다. 수시로 손소독제를 사용 중이니 이따금씩 손을 씻을 때면 진하게 화장한 얼굴을 클렌징 오일로 닦아낼 때처럼 미끈하고 불쾌한 감촉이 느껴진다. 손소독제로 한 겹 더해진 피부막을 비누 거품으로 깨끗하게 씻어내어 온전한 날것의 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손을 씻는 시간이 좋다. 함께 느끼는 비누 향기도.
마스크 속 세상에서 향수는 사치다. 립스틱도 피부 화장도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더운 날 진한 화장은 마스크 속 열기와 더해져 피부 트러블만 만들 뿐이다.
좋은 향기를 소유하고 싶어 비누를 샀다. 마트에서 파는 흔한 비누가 아니라 인테리어 편집숍에 디피 되어있는 하나에 만원씩 하는 독일제 제품이다. 퇴근 후에 손을 씻고, 마스크를 벗고, 샤워를 하면서 향기를 즐기던 예전의 내 모습이 기억났다. 씻을 때 잠깐 동안 내 곁에 머물게 될 향기가 과하지 않아서 좋다.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괜찮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나를 받아들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향기를 즐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