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G1 첼바
어젯밤 무섭게 내리는 빗소리와 요란하게 울리는 재난 알림 사이렌에 잠을 설쳤다. 오늘 오후 3시로 호우경보, 호우특보가 내려져 급하게 모든 업무와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복귀했는데, 창 밖엔 시원한 매미소리만 가득하다. 소강상태인 이 순간이 폭풍전야처럼 느껴져 긴장을 늦출 수 없지만, 이따금씩 들이붓는 폭우 소리도 밝은 대낮이라 그런지 그럭저럭 들을만하다.
동네 로스터리 카페에서 핸드드립 한 잔을 사 왔다. 집 근처에 커피숍이 정말 많지만, 맛 좋은 원두를 취향대로 골라 마실 수 있는 곳은 도보 10분 정도 걸어야 해서 마음먹고 다녀올 수 있었는데, 몇 개월 전 집 앞 1분 거리에 원두를 직접 볶는 곳이 생겼고, 마침 오늘 다녀왔다. 핸드드립 한 잔에 5천 원~6천 원 정도면 가격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늘 마신 에티오피아 G1 첼바는 시큼 고소한 맛으로 쓴맛을 즐기는 내게도 꽤 괜찮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큼한데 너무 시지 않고, 적당히 고소하며, 끝 맛은 부드러워서 한 두 번 더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시큼하지만 괜찮은 새 원두를 만났다.
어제는 오랜만에 맥심 커피믹스를 꺼냈다. 직장생활의 꽃 맥심 커피믹스. 월급쟁이 생활을 그만둔 후로는 먹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랜만에 문득 생각이 났다. 달달하면서 느끼한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괜찮았다. 맛 좋은 원두를 찾아다니며, 탄맛이 많고 기름기 가득한 맛없는 원두커피를 흉보고 다녔는데, 어제는 맥심이 그 어떤 맛 좋은 원두커피만큼 괜찮았다. 내 입맛이 엉망인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오랜만에 맥심을 즐기며 세상사에 단 하나의 정답만을 단정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맛 좋은 새로운 원두를 만나는 건 즐겁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매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 매일 맛 좋은 원두를 마신다고 해서 매일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바로 어제, 맛 좋은 원두를 경험했더라도 오늘도 좋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오늘 나의 몸상태에 따라 맛의 기억도 달라질 테니까.
어젯밤 무서운 빗소리에 ‘사서 걱정하며’ 잠 못 이뤄 몽롱한 일요일 오후, 평범한 일상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순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은 올해이지만, 일상생활을 무난하게 유지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이번 주에는 맛 좋은 커피를 서너 잔도 더 마셨다. 이거야말로 행운이고 행복이다.
제습기, 건조기, 새 침대와 텔레비전 등 갖고 싶은 게 많지만, 역시 그중 제일은 커피다. 맛 좋은 커피 한잔을 종종 즐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일하고 운동하고 컨디션 조절하는 보통의 삶을 쌓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