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마음을 놓아버릴 수 있다면
팀플레이가 매력적인 농구를 좋아한다. 개개인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함께 잘해야 빛을 발하는 게 농구이다. 농구를 모를 때에는 골대에 골을 넣은 숫자로 승패를 겨루는 구기 운동 정도로 생각했는데, 패스와 드리블로 움직이는 공을 따라가다 보면 긴장감과 속도감으로 짜릿함이 기가 막힌다. 실력이 뛰어난 한 명의 선수보다 호흡이 잘 맞아 실수 없는 팀플레이를 펼치는 팀의 경기가 더 재미있다. 리더십이 좋은 포인트 가드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농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NBA나 KBA 같은 프로 선수들의 경기도 재밌지만, 아마추어들의 연습 게임을 보는 것도 즐겁다. 그들은 오랜 연습을 통해 눈빛과 손짓만으로도 서로의 다음 행동을 알아채고 발 빠르게 움직인다. 척하면 척 손발이 잘 맞는 선수들의 소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소통은 신기루 같다. 가까이에 있는 것 같지만 가질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
중학생 시절 같은 반 친구에게 진지하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진심으로 그 친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을 건넸지만, 돌이켜보니 친하지 않은 친구의 개인적인 일에 불쑥 끼어든 게 부끄럽다. 요구하지 않은 조언이나 비판은 ‘나의 판단이 옳고, 너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처럼 상대의 선택을 무시하는 발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인이 되고도 한 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요즘 나의 인간관계는 대체적으로 서먹하다. 이것이 나의 문제인지 나이의 문제인지 서로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인간관계는 유효기간이 꽤 짧다. 주지 않고, 받기를 원하지 않고, 실망도 하지 않는 데면데면한 관계가 쌓여간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그만큼은 해줘야 해.’
내가 준만큼 돌려받아야 한다는 확신, 상대방의 호의를 기대하는 마음은 어떤 이유로 생겨났을까. 사람의 마음은 저울 재듯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물물 교환하듯 주고받길 바라는 마음이 어긋나 ‘베풀고, 못 받고, 실망하고’로 변해버렸다. 애매한 마음이 자꾸 쌓여갈수록 ‘역시 난 안돼.’라는 미궁 속으로 빠져 버린다.
적당한 밀당은 연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텐데. 한때 좋았던 사이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하다 보면 느슨해진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어색함과 서운함이라는 앙금을 만든다. 상대가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먼저 친절을 베풀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떼쓰는 모습이 꼭 아이 같다. 아예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불편한 일이 생기기 전에 서로 더욱 소원해지기 전에 애매한 순간을 알아채고 ‘멈춤’이나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싶은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지난 월요일 밤,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지지와 응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와 밤 산책을 나섰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이 터졌다.
“관계자에게 그 얘긴 하지 말지 그랬어.”
이미 마무리되어 상황 종료된 사건을 다시 되짚은 엄마의 한 마디로 내가 왜 그 이야길 했는지, 내 행동에 대한 변명과 정당성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엄마에게 바라 온 건 ‘역시 내 딸이 최고야, 잘했어, 힘내’ 같은 한 없는 맞장구였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평가였다.
‘나를 지지하고 인정해달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고, 무조건적인 칭찬이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나, ‘자식 잘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을 왜 몰라주나.’로 속상해하셨다. 우리는 각자의 상처를 숨기고, 엉뚱하고 뾰족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다. 남과의 관계에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배려 깊은데 오직 나에게만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엄마가 미웠는데, 나도 똑같다. 나 역시 엄마에게만 너그럽지 못하다.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특차 실기시험을 하루 앞둔 어느 날, 학원에서 모의시험을 보고 평가를 받았다. 담당 선생님께서 다음날 있을 최종 시험에 대비하여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설명해주셨다. 수업시간이 끝나가는데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친구에게만 더욱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선생님을 보고 속이 상해서 자리를 벅차고 나와버렸다. ‘선생님 저도 도와주세요.’ 한 마디 꺼냈으면 좋았을 것을. 친구를 편애하는 선생님이 미웠고, 당당하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시험 전날 밤, 감정 조절을 못했으니 시험날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자연스레 특차 시험에서 떨어졌고, 선생님과 친구를 오랫동안 미워했던 기억이 난다.
20대 후반, 취업하길 원하던 회사의 3차 면접에서 임원진들의 질문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압박 면접은 아니었고, ‘아버지와의 관계’ 같은 묻는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사연 많은 사람처럼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최종 두 명 중 한 명이 뽑히는 그 면접에서 내가 떨어졌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다.’라고 나를 위로했지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생긴 것이다. 욱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과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회하고 가슴 졸이기도 했다. 뾰족하고 서툰 마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 중요한 순간에 더욱 긴장하는 징크스를 없애기 위해, 마음 단련을 시작했다. 심리 상담을 받았고, 운동과, 요가 명상을 통해 평상심을 유지하는 법을 익혔다. 이제는 어릴 적처럼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사람의 본성은 노력한다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조금 달라졌고,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툴고 모난 부분이 있어 관계 맺음이 매끄럽지 못하다.
어릴 때야 어리니까 경험이 부족하니까 용서되기도 하고 이해받을 수 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직도 서툴면 이상한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겪어온 만큼 발전했을 법도 한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나는 여전히 유연하지 못하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혼자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분위기를 띄우려다가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는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서툰 관계 맺기가 들통날까 봐 상처 받을까 봐 겁이 난다.
할 수 없음을 포기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도 나이 듦의 여유일까, 아니면 포기일까. 앞으로 새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에서 알맞은 관계를 적절하게 이어가고 싶은데 역시 지나친 내 욕심일까.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사실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고, 나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달라고 좋았던 그때처럼 잘 지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내 욕심이다.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꼬이기 시작한 건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불편한 마음이 쌓여간다. 아닌 척 없는 척 괜찮은 척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지만 상처 받기 싫고 새로운 도전을 할 용기가 없을 때에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편이 낫다. 원치 않은 인간관계로 마음이 무거운 날이 오면, 도마와 칼을 꺼낸다. 서걱서걱 칼질 소리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렇게 사과잼을 만들고, 복숭아청을 만들었다. 선드라이 토마토에 넣을 마늘도 썰었다. 얇고 일정한 두께로 식재료를 썰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집중하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 잡생각 따위 할 여유가 없다.
어제저녁에는 잘 익은 김치와 파, 마늘, 양파, 청양고추를 썰어낸 후 쌀뜨물과, 다시마물, 돼지고기를 넣어 김치찌개를 끓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칼질을 하다 보면, 애초부터 고민 같은 건 없던 사람처럼 요리하는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얼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퇴근 후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까 했던 고민 같은 건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고, 핸드폰을 보다가 잠이 든다. 보통의 하루가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