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금이 가져온 행복
오늘부터 휴가다. 연휴 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오늘만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휴가를 휴가답게 보낼 생각이다.
언젠가부터 휴가 때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번 아웃될 때까지 일에 몰두하는 편이라 휴가 계획을 세우는 것도 일의 연장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휴가 일정을 정하고, 스케줄을 짜는 것도 버거웠다. 노는 계획도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올해는 예년보다 업무량이 훨씬 줄어들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몸은 쉼을 원했나 보다. 확실히 난 지쳐버렸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밖을 나섰다. 12시가 되기도 전에 출발했는데 1시가 넘어버렸다.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힘겹게 온 이곳. 차가 있었더라면 30분이면 넉넉하게 도착했겠지. 비가 퍼붓지 않았더라면, 덜 끈적이는 날씨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오늘은 휴가 첫날이니까 어떤 돌발 상황에도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날이 궂은 평일 오후, 손님 없는 이곳에 직원 둘과 나 오직 셋뿐이다. 직원들은 아래층에 있고 나 홀로 고요히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여전히 흐린 날씨이지만, 눈이 부시도록 밝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을 테고, 햇살을 피하느라 그늘을 찾거나 찡그렸겠지만, 오늘은 눅눅하고 우중충한 장마철 한낮이라서 나 혼자 아늑한 기운을 만끽하고 있다.
사람이 변하려면 세 가지가 바뀌어야 한다. 사는 곳, 만나는 사람, 시간 쓰는 법. 이 세 가지를 바꾸어야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노력한다고 쉬이 달라지지 않고, 바꾼다고 전보다 나아짐을 보장할 수 없는 변화라는 것. 익숙함에 길들여져 ‘적당히’를 유지하려 애쓰는 요즘, 의도치 않게 공간과 시간, 두 가지를 바꾸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흔하디 흔한 커피숍에 왔을 뿐인데,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하는 내 마음은 평화 그 자체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쌓여있는 업무를 미뤄둔 채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무모한 외출을 시도했지만, 오길 잘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조각 케이크 하나가 전부 인,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바깥의 기운이 온전히 전해지는 커다란 창문 앞에서 얕은 바람과 가랑비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하늘이 흐렸다가 개었다가, 비가 그쳤다가 다시 내렸다가 하는 작은 움직임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 공유 배우가 서울 집 문을 열면 캐나다 퀘벡의 쁘띠 샹플랭 거리로 순간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이곳으로 순간 이동을 경험한 듯 햇살과 나뿐인 이 공간의 기운이 신비롭다. 최근에 이렇게 글이 술술 써진 적이 있었던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창밖 한번 바라보며 마저 글을 쓴다. 글 솜씨가 좋아서 더욱 멋진 글귀로 이 황홀한 순간을 술술 풀어낼 수 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충분하다. 이 순간을 즐기는 사람은 나니까.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어제도 마주했던 햇살인데, 오늘 이 순간을 맞이하는 마음이 새삼 감사하다. 어젯밤엔 우울과 좌절의 기운이 가득했는데 오늘은 아무 걱정 따위 없이 그저 편안하다. 어제의 내가 어떤 고민을 했고, 무엇으로 힘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사는 건 이런 거였다. 짜증이 가득 차오르면 덜어내고, 다시 또 채우면 비우고. 터질 것만큼 버겁다가 불현듯 한 줄기 빛을 만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었다. 사는 거 별거 없는데. 평소와 ‘아주 조금’ 다른 곳에서 충동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호기심과 들뜸이 나를 설레게 한다. 이런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비가 그쳤다.
잠자리 몇 마리가 창밖을 맴돌고 있다. 회색빛 하늘에 빙글빙글 무늬를 그리는 모습이 정겹다.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