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레 Oct 27. 2024

선생님은 교실 어디에나 있다!

참기술인이 되기 위한 지난여름의 노오력

지난해 여름, 잠시 학생으로 돌아갔다. 아침 8시쯤 집에서 나와 백팩에 교재와 샤프, 지우개, 자 등 바리바리 챙겨서 버스로 40분 거리의 학원으로 출석 도장을 찍었다. 들어선 교실 맨 앞에는 구식 컴퓨터와 함께 ‘참기술인 육성’이라는 교육 목표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80년대생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인테리어였다. 


들어서자마자 흠칫 하게 된 교실의 풍경


참기술인이 되기 위한 조경기능사 실기를 그 교실에서 30명의 클래스 메이트와 함께 했다. (20대에서 60대까지 한 곳에 모여 있는 우리를 급우라고 칭할 수 있나 머뭇거려진다.) 사실 나는 기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저 조경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조경기능사 실기 시험은 조경 설계와 수목 감별, 조경 작업의 3가지 시험으로 구성되는데, 필기는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혼자 준비했지만 조경 설계와 작업은 비전공자에 경험도 없는 내가 독학하기는 어려워 학원에 등록했다. 


가볍게 시작한 내 맘과는 다르게 첫날의 자기소개에서 다들 이 자격증으로 취업을 하고 또 창업을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선생님도 기대에 부응하고자 철저히 합격을 위해 짜인 커리큘럼을 공유했다. 조경을 배운다기보다는 시험 통과 기술을 배웠다. 설계가 가장 중요했다. 점수 비율도 높고 처음으로 보는 시험인데 일정 수준 그리지 못하면 다음의 시험을 볼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90시간의 수업시간 중 80%를 설계에 투입하겠다 선언했고, 당일 바로 도면 그리기에 들어갔다. 


앞서 밝힌 포부와 달리 연륜 있는 동급생들은 mm까지 다 맞춰 그려야 하냐고 질문했다. 또 선생님의 설명이 적힌 칠판과 책상 앞에 놓인 제도판 위 도면을 번갈아 보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을 너무나 당당하게 ‘안 하면 안 되냐?’ 묻는 기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또 열심히 제도하고 있으면 뒤로 불쑥 다가와 ‘그 마스킹 테이프는 어디서 산 거냐’, ‘네 자는 본인 자보다 좋아 보인다’ 질문을 던져 나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수업 분위기에 적응하긴 어려웠지만, 나 또한 조경기능사를 획득하고 싶었기에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나만 있는 듯 주변 상황을 등 뒤로 배제시키고 도면에 집중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내게 이것저것 묻던 뒷자리 어머님이 비타500을 내밀며 지난주 고마웠다고 말을 전했다. 그저 묻는 것에 대답했을 뿐, 방어적이고 냉랭한 인간이었는데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때부터 내 뒷자리의 어르신들, 나이 먹은 반 친구들에게 조금씩 경계심을 풀었다. 물론 아직 그 나이에 다다르지 않아 모른다. 다초점안경을 쓰고 제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도면을 그리기도 힘든데 외워야 하는 치수와 이름들이 매일 더해지니 푸념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시험이 가까워지고 수업시간인 90시간이 찰수록 반의 수준은 합격을 향해 상향 평준화 돼 가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그리던 도면


오후 1시에 수업이 끝나도 대부분의 어르신 동급생들은 자리에 남아 제도 연습을 하고 5~6시는 돼야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묵묵히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특유의 연륜으로 우리 반에서 도면을 젤 잘 그리던 20대 반장에게 점심 로비를 하며, 오후 선생님으로 매수해 도움을 받는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이 바쁘다 싶으면 본인보다 잘 그리는 아무나에게 푸념+질문을 던지고 도움을 받는다. 조경작업 수업의 경우 연습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선생님께 부탁해 결국 없던 추가 실습도 만들어냈다. 


나 또한 크게 도움을 받았다. 실기 과목 중 수목 120종을 감별하는 시험은 별도의 강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공부해야 하는 항목이었다. 잎과 줄기, 꽃 사진만 보고 그냥 나무 이름을 맞춰야 하는데, 도시에서 나고 자라 빌딩숲에서 12년 일한 내게는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배분되는 점수도 적어 적당히 찍고 점수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뒷자리 어머님이 날 불렀다. 점심 먹고 같이 공부하고 가자고.


어머님은 주말에 수목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 완전 마스터 했다면서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동급생들의 수목 공부를 도와주기로 했단다. 젊은 내가 와서 같이 도와달라 SOS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녀가 도와줘야 할 동급생 중 한 명이었다. 설명을 하면서 내게 ‘너도 몰라?’, ‘이것도 몰라?’의 눈빛을 보내셨다. 


보라색 열매를 가진 좀작살나무를 BTS의 응원색과 연결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살나는’ 그룹이라는 설명을 곁들이며 그녀만의 암기법을 전파해 주셨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고민해서 연상법을 만들 일인가? 감탄하며 그녀의 수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BTS를 아는 건 그녀와 나뿐이었다.) 알고 보니 학원강사 생활을 오래 한 짬에서 나오는 강의였다. 그때의 신선한 암기법을 바탕으로 포기했던 수목 공부를 벼락치기할 수 있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한 달 뒤, 우리의 조경기능사 실기 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종강 후 소강상태였던 단톡방이 너도 나도 합격했다는 감격의 메시지로 소란스러워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으셨던 분께서는 학원 선생님을 비롯해 반장, 오후의 또 다른 선생님이 된 동급생들의 이름을 샤라웃 하며 감격의 합격 소감을 전했다. 그리고도 두 달 뒤에는 자격증을 인정받아 취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진정한 기술인으로 거듭난 동급생이었다. 나는 자격증은 획득했지만 참기술인은 되지 못했다. 다만 참 열심히 했고, 참 재미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응원도 위로도 self!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