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 지어진 건물이 카페로 변한 공간에 간 적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당시 규모가 있던 인쇄소 사택으로 이용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부사령관 관사로 활용하다가 개인소유로 되고 이렇게 카페가 되었다. 중간에 길이 나게 되어 건물이 반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건물로 태어났는데, 다양한 역사를 겪었다. 그 당시 다른 건물들을 어디로 갔을까. 그 당시에도 이 건물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돋보이는 건물이었을까 궁금하다.
사람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우리 모두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가정에 가족으로 자리 잡고 살게 된다. 삶의 터가 생긴다.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 개개인의 역사는 다르다.
엄마는 내가 돋보이기를 원하셨다. 우리 시대에는 ‘알파걸’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어렴풋이 뜻은 알고 있었지만 인터넷으로 사전을 찾아보았다.
‘으뜸’, ‘최상’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그리스어의 첫 자모(字母)인 알파(α)와 걸(girl)을 결합한 말로, 리더십과 자신감 그리고 성취욕, 진취적·혁신적 사고와 도전의식을 갖추고 뛰어난 학업성적과 왕성한 교내·외 활동성을 보이는 여학생들을 가리킨다.
알파걸이란 말은 2007년 아동·청소년 심리학자인 댄 킨들런(Dan Kindlon)이 펴낸 <알파걸: 신 미국소녀,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이해>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
댄 킨들런은 미국의 10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과거와는 다른 예비 엘리트 여성의 특징을 발견하고, 그런 특징을 갖춘 여학생들을 알파걸이라고 불렀다. <출처:네이버사전>
1950년대 후반에 태어나신 엄마는 베이비붐 세대였다. 막내라서 다른 언니들과 달리 당시 고등학교까지 나오셨지만, 아마도 성취에 대한 욕구가 있으셨던 거 같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 자식들에 대한 학구열을 빼놓기 힘들다. 우리는 베이비붐의 자식세대로 초등학교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다녔다. 학교 교실이 모자랐다.
‘친구들보다 잘해야 해.’
엄마가 가슴속에 심어준 씨앗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잘하려면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사 남매였다. 방 세 칸, 혼자서 방을 쓸 수 없던 구조였다. 몇 달 정도 내 방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그 시기에 공부습관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엄마는 학교에 갔다 오면 교과서에 각 단원마다 동그라미를 서른 개 치게 했다. 한 번 읽으면 동그라미 하나 위에 선을 긋는다. 그렇게 모든 동그라미가 반으로 나뉘었을 때, 책 읽기가 완료된 거다. 그 이후에는 각 관련 과목 전과를 읽어야 하고 문제집을 푸는 순으로 공부를 시키셨다.
공부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친구들과 골목에서 나가 노는 건 금지였다. 다만 학원에 늦게까지 있는 건 괜찮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알게 되었다. ‘놀았던 기억’에 대한 추억이 각자 있었다는 걸.
부러웠다. 나는 학원에 대한 기억밖에 없다. 골목에서 뛰어논다는 게 뭘까,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해질 때까지 술래잡기를 했다는데 나와 같은 세대를 산 사람들이 맞나 싶었다. 나는 왜 학교를 오갔던 기억과 집에서 기억, 쉬는 시간 공기놀이 기억 정도가 전부일까.
아버지는 경남 소도시로 옮겨 다니며 일을 하셨다. 잠시 창녕에 살 때 우리는 회사 아파트에서 몇 년 살게 되었다. 그때 기억이 전부다. 작은 언덕 폐허 근처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아마 매일 그러지는 않았을 거다. 엄마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받아쓰기를 시키셨다. 기억난다.
엄마가 바라는 건 뭐였을까. 딸이 전문분야에서 당당하게 돈 벌고, 큰소리치고 살기를 원하셨던 건 아닐까. 엄마의 세 딸들은 모두 전업주부가 되었다.
알파걸로 키워지는 것과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건 다르다. 엄마는 막연하게 생각한 무언가를 나에게 바라셨다. 나도 엄마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마 엄마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마음이었을 거다. 그 욕망을 타고 아버지 월급 중 일부는 학원으로 직행했다. 학원은 엄마 손에 이끌려가는 곳이 아니라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공부를 보충하는 곳이다.
선행학습과 사교육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 초등학생 큰 아이는 1학년이 되기 전까지 한글을 배우지 않았다.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하면서 익혔다. 지금은 1학년 1학기에 한글 받아쓰기를 시키지 않는 문화가 정착했지만 당시에는 이미 다 알고 온다는 전제로 학교 교육이 이루어졌다. 아이는 조금,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부모의 의지대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건, 아이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구나.’하고.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아이에게는 부담이다. 육아를 하면서 ‘적당히’는 참 힘들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한다.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엄마에게 이야기해.”
그렇게 아이 학원을 결정한다. 아이가 무언가 배우고 싶으면 친구들 따라가서 눈으로 보고, 하루 체험해보기도 하고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부모가 해주어야 할걸 알게 되었다.
내 아이를 지켜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어떤 학원에서는 경쟁을 권했다.
“다른 친구는 해내지 못했다고 분해서 우는데, 너는 그런 마음이 없니?”
선생님의 생각은 아이에게 전해진다. 나는 아이 건강을 위해서 보낸 곳인데 학원에서 경쟁을 강요했다.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겠다 싶었다.
또 한 번은 선생님이 몇 주마다 바뀌었다. 학습지가 중심에 있었지만 우리가 살면서 하는 대부분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변동은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때 그만두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당장 다른 곳에 뛰어가서 등록했다.
아이는 5년째 한 선생님과 안정적인 관계로 공부하고 있다. 부모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내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 힘을 내 아이를 억누를 때 쓰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알파걸은 엄마에게 의해 길러진 딸들에게 자주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 스스로 선택하고 걸어간 길이었다면, 어떤 이름이 붙었을까.
(사진출처 : Pixabay로부터 입수된 Daria Głodowska님의 이미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