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타티스 Sep 14. 2023

꿈에 그리던 직장에서

공원에서 상담실까지

 멀리서 보는 풍경과 가까이서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대학교 2학년 광역시에 있는 공원으로 현장학습을 갔다. 그 당시에는 3.3㎡를 1평이라고 쓰던 시절이었다. 110만 평 공원이 남쪽에서는 흔치 않았다. 1차 지역만 오픈한 상태였다. 그 넓은 공원에 입장료도 없었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흘렀다. 회사 원서를 내려가는 길이다. 엄마는 굳이 같이 가겠다고 하셨다. 이제 나이도 스물다섯인데 엄마는 열다섯 그때처럼 같이 가길 원하셨다. 버스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탔다. 그렇게 2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 지원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동행이었다. 주택공사 면접 보러 서울로 갈 때도 엄마는 함께였다. 지금 생각하면 회사 면접 보러 가는 딸 혼자 보내는 게 당연한 일인데, 엄마는 같이 가셨다. 그만큼 자신과 동일시하셨던 건 아닐까 싶다. 그 회사는 최종면접에서 똑 떨어졌다. 이번만큼은 합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으셨을 거다. 필기시험 치는 날, 아버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뒷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무슨 문제가 나올지 몰라서 대학교 때 교재를 읽었다.


 아버지 덕분에 안전하게 고사장에 도착했다. 각 파트별로 다른 교실에서 쳤다. 도착하고 보니 아는 얼굴도 있었다. 2명 뽑는데, 필기시험 통과자는 2명이었다. 다행히 안심하고 면접을 봐도 되었다. 아주 큰 일만 내지 않으면 합격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그 공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공원에 가면 즐거울 줄 알았다. 행복할 줄 알았다.


 공원 여러 구역 내에 장미원이 있었다. 처음에는 장미만 보였다. 94종 정도 되었다. 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일 보고 또 보았다. 관리되는 내용을 기록해야 했기에 일정 시간 텀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매일 보니 어디에 무슨 장미가 있는지 외울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다른 게 보였다. 어떤 장미에 이상이 왔고, 근처에 고라니가 내려와서 새순을 먹은 구역, 검은 무늬병이 온 구역, 배수가 잘 되지 않아서 습한 지역 등등 관리 대상인 구역이 더 눈에 들어왔다.


좋은 것보다는 일할 대상만 보였다.


 학생 때 상상 속에는 막연히 공원에서 일하면 좋겠다 싶었다. 매일 2시간 걸려서 출근했다. 도착해서 넓은 공원을 걸어 다녔다. 공원관리 전기차량이 있지만 관리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서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한여름에 시원한 사무실에서 벗어나 현장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열면, 숨이 턱 막혔다. 여름 햇볕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모자도 선글라스도 눈치를 봐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때는 힘들었다. 내가 상상했던 회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관리업무가 주요 업무다 보니 내 아이디어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태풍 대비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고, 추위가 오면 겨울 초화류가 얼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를 잘 몰랐었다. 이상적인 직업과 회사를 상상했다. 그 안에 있는 내 모습만 생각했지,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떤 업무에 능력을 더 발휘할 수 있는지 몰랐다.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을 그토록 한순간에 내려놓고 나온 건, 내 상상과 현실에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일에 도전했다. 나는 자극추구가 높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꽃꽂이부, 대학교 조경학과, 미술관 도슨트, 시설관리공단 임업 7급 근무, 사서교육원수료, 도서요약기술사수료, 꿈만필수료, 웨딩플래너, 산업강사양성과정 수료, 아내, 주부, sns기자단, 출판사 서평단, 육아카페 엄마칼럼니스트, EBS스토리기자단 등 떠오르는 것만 적어보았다. 결과적으로 한 분야를 오래 파진 못했다. 그래서 많이 떠돌아다녔다. 매 순간 가슴 뛰는 일을 찾았다. 꿈에 그리던 직장을 그만두고, 10년을 찾아 헤매었다.


엄마가 걱정하셨다.

"그러지 말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해."

부모님 눈에는 알파걸로 키운 딸을‘제대로’된 직장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을 거다. 본인들의 자랑으로 삼고 싶으셨을 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지방시설관리공단 신입공채에 지원했다. 중고 신입이었다. 필기시험은 통과했고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아이 엄마는 신입공채로는 힘들겠다 싶었다. 현실이었다. 경력단절여성이다. 사람들은 그랬다.

"그러게, 정년 보장되는 직장에서 왜 나왔어."

그 회사 최종면접에서 합격했다면, 지금 둘째는 없었을 거다. 삶에서는 성취도 실패도 내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꿈에 그리던 직장은 그야말로 내 마음속에 있었다. 누군가에 눈에 좋아 보이는 곳, 정년이 보장되고 먹고살기에 지장 없는 곳이 꿈에 직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월급통장은 잃었지만 나를 찾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나를 더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에 나를 만나게 되었다.


20년도 석사입학 후, 4년째 상담을 하고 있다.


앞으로 십 년, 내 삶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 뿐이다.





(이미지출처 : Pixabay로부터 입수된 � Mabel Amber, who will one day님의 이미지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파걸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