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여기 편하게 이야기하러 왔잖아요!”

단어시험 준비하는게 어떻겠다고 물어보는 나에게 둘째가 한 말

by 스타티스


2025.1.16 목

필리핀 어학연수를 시작한 지 일주일하고 나흘이 지났다. 이제 생활에도 점점 패턴이 잡혀간다. 저녁 7시쯤이면 아이가 하원 차량에서 내린다. 하루 8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온 후다. 저녁 8시, 씻고 나서 탁자에 앉아 숙제를 시작한다. 둘째는 숙제할 부분을 펼치고 집중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영어펜은 생각만큼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 대신 내 미니 키보드와 패드를 활용해 단어를 찾아본다. 놀랍게도 아이의 타자 실력이 꽤 뛰어났다. 단어를 검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나보다 짧아 보였다.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숙제를 하던 아이는 책을 탁하고 덮었다.


“ㅇㅇ아, 혹시 단어시험 치니?”

“응, 나 다 틀리고 하나만 맞았어.”

“ㅎㅎ, 혹시 단어 공부할 생각은 없니?”

“엄마, 우리 여기 편하게 영어로 이야기하려고 온거예요. 단어공부하려고 온거 아니예요!”

단호하게 말하고 패드를 들고 침대로 간다.


둘째는 그림 그리기가 취미다. 숙소에 오자마자 씻고 숙제를 서둘러 끝내는 이유도 바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요즘 아이가 집중하고 있는 작업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캐릭터를 인어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언니와 나에게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느냐고 묻곤 한다. 나는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와 모아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딸은 언니의 패드에 있는 굿노트 어플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존 캐릭터들을 활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인어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아이가 숙제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더 빨리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아이는 열심히 숙제를 한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뿌듯함도 느껴졌다.

단톡방에 내일 단어 시험을 본다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물었다. “혹시 시험 못 보면 한국에 못 돌아오는 거야?”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남편과의 톡에서도 “기간이 좀 남았으니 체력관리 잘해”라는 말을 들었다. 지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 “너는 뭐든 열심히 하잖아.” 그러게,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일까.


아이와 단어 시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깊은 생각에 빠졌다. 첫째와 나눴던 단어, ‘유기불안’이 떠올랐다. 나는 혹시 소모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내가 추구하는 발전이 진정한 성장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자리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2월 스케줄을 점검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첫째 주는 입국과 이사, 둘째 주는 대학교 상담실 교육 주간, 셋째 주는 사례 발표와 서울 일정, 넷째 주는 이사 마무리.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지?’ 돌아보니, 미래의 시간을 지금 이 순간으로 끌고 와서 걱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막상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해낼 것 아닌가. 필리핀에 오기 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효율’. 나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싶어 한다. 이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국, 두려운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이 두려움이 나를 이렇게 열심히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아이가 부러워졌다. 쿨하게 책을 덮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그 용기가. 나는 그 용기가 없는 거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하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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