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에세이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아저씨를 애써 외면하기 위해서 눈을 감아버렸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착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막상 내 진심이 따르지 않을 때. 보고 있자니 여간 마음이 불편하여, 차라리 눈을 감았던 것.
아무도 나를 주목하진 않았겠지만, 혹시나 내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어, 모르는 척 하는게 티가 날까봐 괜히 부끄러워졌다. 문뜩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와글와글한 초등학교 교실 안, 선생님께서 수업을 진행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들을 통제하는 데에 성공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할 때마다 두 눈을 감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릴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손만 머리 위로 올리거나 혹은 눈만 감고는 종종 손을 내리곤 했다. 게다가 개중에 실눈을 뜬 친구가 꼭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것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어쩌면 오늘의 나처럼 파르르 떨리는 (실눈이라기 보다는) 반쯤만 감은 눈을 뜨고 화난 선생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내 조용해진 교실에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실눈 뜬 거 다 알아! 똑바로 하지 못하니?"
우리가 그토록 어릴 때, 나의 실눈 쯤은 발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렴 선생님의 눈에는 안보였을 리가 없다. 어린 마음에는 그게 선생님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최선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런 얄팍한 속임수는 어른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그렇다. 과장된 거짓말이나 행동에 애써 속아주는 어른을 보며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은 모를 리 없다. 정말이지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스스로를 이미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어떨까.
아이보다 교묘하고 섬세한, 때론 센스있는 거짓을 말하는 어른은 어떨까. 정말 아무도 거짓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하여도, 양심에 대해 거짓말은 없는 터. 그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스스로 알고 있을 뿐이다.
'정직'에 대한 가치가 이런저런 이유로 낮아진 시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이 생각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고민이 실려온다. 나는 다만 거짓을 모르는 어른이고 싶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담백하고 진실된 선택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