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달. 무슨 달

그 달.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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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T>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템이 두 개 있는데, 자전거와 달이다.
나는 <E.T>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저 유명한 장면 몇 가지를 <출발 비디오여행> 같은 프로그램에서 셀 수 없이 많이 보았을 뿐이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영화를 본 나의 혈육은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E.T>에 대한 아련한 향수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E.T>의 저 유명한 장면, 자전거를 타고 하늘로 떠올라 달 앞을 지나가는 아이와 <E.T>의 실루엣에 대해 나도 언제부턴가 아련한 향수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영화는 보지 않은 상태다. 기억의 수풀 사이를 양손으로 뒤적거려보니 저어기 극에 가까운 곳에 잠시 머물렀을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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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극지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곳이었고, 알래스카가 멀지 않은 외진 시골이었다. 비행기지만 당일치기로 알래스카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 또는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낮시간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밤이 되어 같이 지내던 친구들과 숙소에서 마구간 쪽으로 산책을 나갔던 기억만 있다.


아주 까만 밤이었다. 밤이라고 하지만 사실 7시 30분? 8시 쯤이었다. 극에 가까웠던 그 곳은 여름이면 해가 무척 길어 오후 10시 30분도 오후 3시 같아 배드민턴을 칠 수 있었고, 겨울에는 해가 아주 짧아 오후 3시반 쯤엔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겨울 일몰시간이 정확히 몇 시였는지는 상당히 헷갈리지만, 놀라우리만치 일찍 어두워졌던 것은 기억한다.


겨울이면 그렇게 일찍 어둑해져서 주로 숙소에 있곤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늘 그렇듯 괜히 조금 설레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친구 중 하나가 말에게 밥을 줘야했기 때문인지 그것또한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여튼 아이들은 여럿이 함께 가기로 했다. 사실 시골의 겨울 밤길을 30분 정도 걷는다는 건 조금 위험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곳은 곰과 하이에나가 자유롭게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척 추웠다. 아마 영하 35도-45도 사이였을 것이다. 낮시간에도 종종 영하 45도였으니, 그 밤엔 영하 50도 쯤이었을 수도 있다. 옷을 하도 껴입고 나가서 몸이 그렇게 둔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쉬어야 하니 얼굴을 다 가릴 수가 없었고 숨을 쉬면 들이마신 공기가 코 속에서 물기를 만나 꽝하고 급속 냉동이 되었다. 그게 재미있어서 깔깔거리곤 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거나, 춥다 추워하는 목소리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꽤 걸어갔는데 저어기 앞에 너무 크고 밝은 무엇인가가 보였다.

차가 오나?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차라고 하기엔 무척 거대했다. 너무 밝고 커서 혹시 외계비행물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다들 발걸음을 서둘렀던 것 같다. 무수히 많은 나무와 그 가지들 너머의 빛을 향해 걸었다. 아마 작은 오르막을 넘어 마침내 그것의 형체를 완전히 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들은 깔깔거리지 않았다.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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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었다. 달이라고?

지금은 그 달 앞에 있지 않으니 한번 더 되묻게 된다. 달이라고? 하지만 그 앞에 있었다면 누구도 되묻지 않았을 것이다. 달은 지구의 육분의 일 정도의 크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지만, 우리가 본 달은 너무나 커서, 저것이 지구가 아닐까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참으로 달의 모양이었다. 이렇게 달이 큰 이 곳에 어째서 추석과 정월대보름이 없는걸까 라는 생각은 그 후로 한참과 한참이 지난 뒤인 지금에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에는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달을 마주했던 그 순간엔, 코속에서 바짝바짝 얼어가는 공기도, 뺨을 가르듯 부는 차가운 바람도, 내 옆의 다른 생명들도 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감각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까. 나를 너무나 작게 만든 거대한 달 말고는 아무 기억이 없다. 달을 마주하고 있는 나는 온 우주에 달과 나 뿐이거나 우리 둘 또한 우주의 일부이거나 전체인 기분이 들기도, 또 달로 대표되는 우주와 내가 일대일로 대면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건 마치 갑자기 모든 깨달음과 모든 겸허함을 번개맞듯 온몸으로 맞아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영원 속에 있는 기분. 한없이 평온했다. 원죄 이전의 인간이라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최초의 목격이 준 충격파가 지나간 후, 그러니까 영원같은 기분에서 깨어난 나는 어째서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현실적인 한탄을 시작했다. 어차피 너무 어두워서 삼각대 없이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테고, 또 너무 추워서 그렇게 머물러 오랫동안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약간의 미련처럼 남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없는 평온함에 대한 기억보다는 물성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더 아쉬운 것이 인간의 천성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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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생각이 빠르게 지내가고, 우리는 금새 "꼭 E.T 같아!" 하며 들뜬 표정으로 웃었다.

시린 공기는 달이 더욱 깨맑은 빛을 내는 것을 돕고, 달의 둥근 테두리를 마치 칼을 사용한 듯 깔끔하게 오려내주었다. 가짜같았다. 꼭 트루먼쇼처럼. 조금만 더 걸어가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달을 꼭꼭 쳐다보며 마구간을 향해 계속 걸었다. 마구간에서의 할 일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달을 등지고 숙소로 걸어갔다. 아마 자꾸만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돌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가는 길이 달빛으로 환히 보여서 달이 거기 그대로 있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끔 등을 돌려 달을 바라보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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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아직도 거기에 있겠지? 그 이후로 그런 달은 보지 못했다.

종종 생각한다. 달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설사 달이 사라졌다고 해도, 허술한 기억이나마 내가 가지고 있으니 달은 아직도 있는 셈이다. 등을 돌려 달을 바라보지 않아도 내가 가는 길에 저 달빛이 비추이니 달은 아직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치만 나는 가끔 등을 돌려 달을 바라보고 싶다.

달과 얼굴을 마주하여 그 빛을 받고 싶다. 꼭 축복같던 그 달빛을 온몸 가득히 받고 싶다. 싸한 겨울 공기가 잔뜩 묻은 그 달빛을 한번 더 온몸 가득 머금어 보고 싶다. 내가 우주의 일부이며 전체이며 영원의 일부이며 영원 그 자체라는 걸 한번 더 오롯이 느껴보고 싶다.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를 조금 빌려 생을 살아가고 싶다.





2017. 10. 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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