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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Aug 25. 2018

헤어졌는데 고맙네.

진심이야.

-

헤어진 다다음날, 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가벼운 대화들이 오고 가다, 무슨 말 한마디가 낚시바늘처럼 내 깊은 마음을 걸어 끌어올렸다.

이미 헤어졌으니 헤어짐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그 낚시바늘을 다시 깊게 삼키지 않았다. 그 바늘에 걸려 올라오는 것들을 그대로 토해냈다.


“내 말 좀 기다려요.

말 좀 끊지 말고.

난 할 말이 없는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들은 것을 정리해서 판단하고 나의 생각을 꺼내어 다시 얘기하기까지, 나는 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크고 빠른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잠잠해졌다.

무서울 게 없는 나는 더욱 용기가 났다.


“지금의 나는, 다 받아줄 사람이 필요해요.

네가 원하는만큼 너를 받아줄 여유가 여력이 없어요. 나도 그게 미안해요. 그렇지만 나는 이제라도 진짜 나쁜사람이 되고 싶어요. 착하지도 않은 내가 착하다는 말 듣기도 이제 불편하고 지긋지긋해요. 내가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요? 이젠 정말 내 성질대로 살래요. 나 없는 내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 뒤로 다시 이들이 지났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말은 빨랐다. 그러나 그는 종종 달려가는 말을 멈춰 세우곤 했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소주를 시켰다.


나는 소주 석 잔을 털어넣었다.

사골순댓국보다 소주가 먼저 위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기분이 들떴다.

나는 깔깔거리며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


“너는 너무 네 할 말만 해요~ 네가 신은 양말 맘에 안들어요! 성질은 왜 이렇게 급해요? 너 입맛이고 뭐고 너무 까다로워요! 말 좀 예쁘게 했으면 좋겠네 정말~ 게다가 안해도 될 말은 왜그렇게 한담, 투머치인포메이션이에요, 또...”


하고 싶었지만 그가 화를 낼까봐 하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흥겨우니 그의 기분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한껏 까불고 잔뜩 내뱉고 계속 깔깔거렸다.


그동안 그는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조용히 웃거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크게 웃었다.



-

나는 피곤해졌다.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그는 내 가방을 들어주거나, 물을 챙겨주거나, 내 발등 위에 맺힌 피를 닦아 주었다. 새 운동화를 신고 그를 만나러 나갔던 날 생긴 상처였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말했다.


“다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랬잖아요?

사실 그 말은 나한테는 매력없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나니 네 지난 삶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았어요. 너를 조금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나는 네게 잘해주고 싶어요.”



-

우리는 누구도 서로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간혹 메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고, 웃기도 했다.

내 일상을 이야기 할 때,

“보스가 오늘까지 말해주길 원했거든요” 혹은 “그 일을 해주길 바라길래 같이 해줬어요” 와 같은 이야기들이 있곤 했다.

그러면 그는,

“보스 말과 상관없이, 네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어요?” 혹은 “그 일을 해주고 싶어서 해준거에요 아니면 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서 해준거에요?” 라고 되물었다.


내가 “시간 많이 뺏은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리고 나면 그런 생각 안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나 편한대로 할테니까, 그런 생각 아예 안했으면 좋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

진심으로 고마웠다.


사소하지만 불편한 나의 진심들을 편하게 내뱉을 수 있도록, 무엇을 말해도 안전하다고 얘기해줘서, 무엇이든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 덕분에 내가 진짜 원했던 것들이 조금씩 선명히 보여졌다. 사소하고 불편한 나의 진심들에 가려져있었던 것들이었다. 나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고 큰 선택 앞에, 내가 가장 우선이었는지를 물어봐주어 고마웠다.

내가 내 삶의 가장 한 가운데에 있는지를 물어봐주어 고마웠다.

하여, 우리가 얼기어져 만났던 그 시간들보다 그 이후의 시간들이 나는 더 고마웠다.



-

이미 헤어진 우리는 다시 어느 형태로든 헤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다독여 준 그의 마음들은 내 삶 한 가운데의 내 속에 함께 잘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나의 일부가 되어 나와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런 의미로 그는 나의 일부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에게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나의 인연들에게 그런 마음을 건네려한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우주 속에서 영원할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네가, 내가 가능한 많은 우주 속에서 영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내 조그만 축복의 언어가 너에게 약간의 보답이라도 될 수 있다면 또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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