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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Sep 01. 2018

나와 아버지와 야옹이의 일주일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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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일주일이 마침내 지나갔다.



-

갑작스럽게 인수인계를 받게 되었다.

일주일 이상 걸리는 일을 삼일 만에 해치워야 했다. 안구건조증이 있는 나는 말 그대로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튀어나가려는 눈알과 놓아지려는 정신줄을 다잡기 위해 나는 저 유명한 잠언을 되뇌였다.

‘이것 또한 지나간다.. 이것 또한 지나간다..”


지구에 머물었던 수많은 현자들의 말은 옳았다.

이것 또한 지나갔다. 마침내 기다리던 금요일이 되었다.


-

늦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여사께서 정성스레 고기를 삶아놓으셨다. 잘 삶겨 말랑말랑한 돼지고기는 대강 씹어도 술술 넘어간다. 기분이 좋다. 이럴 때 마침 집에 탄산음료까지 있다. 포도맛 웰치스를 딸깍,하고 따서 투명한 유리잔에 꼴꼴꼴 따라놓는다. 두어 번 꼴깍꼴깍 삼키니 "캬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소주가 부럽지 않았다.


이렇게 넘치게 피곤하지만, 금요일이다.

금요일이라면 이대로 그냥 쉴 수가 없다.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잠들어 계시던 아버지가 일어나시더니만 슬쩍 말을 건네신다.


"거, 아스크림.... 하나 읍제?"

얼마나 잡숫고 싶으시면 오밤중에 깨서 물으실까 싶어 내가 다시 여쭸다.

"사오까요?"

아버지가 답하신다.

"으응.... 아니다 아니다, 피곤한데 마 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딸이 사 올 것이라는 확신을 담은 미소였다. 저 미소에 낚여 내가 슈퍼에 다녀온 게 벌써 수차례다. 그러나 나는 흔쾌히 한번 더 낚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혼자 낚일 수는 없지.

마찬가지로 넘치게 피곤한 혈육을 꼬셔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나온 김에 산책 좀 하자고 혈육을 끌고 다녔다.


-

그렇게 좀비 꼴을 하고 동네를 걸었다.

_인수인계가 얼마나 빡빡했는지 아냐고, 하지만 내가 누구냐고. 숱한, 게다가 긴박하기까지 한 인수인계들을, 심지어는 전임자가 존재하지 않는 인수인계까지도 혼자 해냈던 내가 아니냐고, 그렇지만 이번에 떠난 동료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고_


그런 뻔한 얘기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피로에 취했는지 웰치스에 취했는지 금요일에 취했는지 아무튼 무엇이든지 간에 잔뜩 취한 채였다.


-

그렇게 취한 채로 골목을 걷다 아직 작고 어린 얼굴의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몸은 꽤 컸지만 분명 아직 성묘는 아니었다.


'예뻐..'

평소에는 그냥 훔쳐보고 지나갔을 고양이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에 취해있었다. 나는 용기가 나서 고양이를 불렀다.


"야옹이- "

고양이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나라면 눈을 천천히 두어 번 껌뻑,껌뻑하여 인사부터 건넸겠지만, 취해있던 나에게는 그런 생각의 틈이 없었다. 예의도 없이 고양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보게 야옹네- "

검고 하얀 고양이는 내가 자기에게 다가가는 걸 발견하고는, 늘어진 걸음을 끌고 회색 승합차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혈육이 말했다.

"야옹이도 쉬고 싶을 텐데 왜 괴롭혀"

"예쁘잖아. 만지고 싶어"

"야, 너 쉬려고 가만히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니 이름 부르면서, '00이~ 만지고 싶어~' 이러면

 소름 아니냐 소름?"

그렇네. 공포네 공포.


야옹이도 하루 종일 먹이를 구하러 다녔겠지? 어쩌면 야옹이도 방금 막 이 동네에 대한 인수인계를 끝내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다 깬 아버지 고양이의 은근한 기대를 모른 척하지 못해 어디 참치캔을 찾으러 길을 나섰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떻게든 긴 주간을 보냈을 텐데, 겨우 좀 쉬려는 것을 내가 방해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몇 걸음 채 가기도 전에 미안한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멈추어 뒤를 돌아 그 마음을 조금 떼어 고양이가 들어간 승합차 언저리에 던져 놓고 다시 골목길을 나섰다.


-

좀비같은 걸음을 마저 옮겨 드디어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했다.

아이스크림을 만 원어치 샀다. 만원 어치를 현금으로 사면 아이스크림 한 개를 더 주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만 원어치를 샀다. 하여 만 원어치면 사백원짜리 막대 아아스크림이 스물여섯 개다. 스물 여섯개를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았다. 그중 절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비비빅이다.


막대 아이스크림 한봉지에 의기가 양양해졌다.

그 기세로 집에 돌아가 주무시는 아버지를 큰 목소리로 깨웠다. 부스스 일어난 아버지가 검은 비닐봉다리를 보시더니 빵끗 웃는다. 비비빅 봉지를 까서 쥐어드렸다.


아버지는 갈비보다도 더 맛있게 비비빅을 베어 드셨다. 비비빅 한 개를 순식간에 꿀꺽하시고는 바로 자리에 다시 누우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버얼써.. 며칠 전부터.. 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하시더니만 순식간에 다시 잠에 드셨다.

혼자서는 아이스크림도 잘 못 사드시는 옛날 사람, 옛날 남자.


-

빈 비비빅 봉지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버지 방에 불을 꺼드리고 나왔다.

나는 비비빅 대신 냉장고에 오랫동안 묵혀둔 깔루아에 우유와 얼음을 잔뜩 넣어 내 방으로 왔다.  

취해 있어서 더 취하고 싶었다.


차가운 깔루아를 벌컥벌컥 마시며 뻑뻑하여 묵직한 내 두 눈과 아버지와 비비빅과 야옹이를 생각했다.

나와 아버지와 야옹이의 일주일을 생각했다.


모두 참 고생이 많았고 많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겐 비비빅이, 나에겐 깔루아가 위안이 되었다만 야옹이는?

야옹이에게도 분명 어떤 위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말아버렸다.

모두에겐 반드시 어떤 위안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내 멋대로 나를 위안해버리고는 말아버렸다.


아, 그런데, 정말 저 말이 위안이 되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있을거라는 믿음이 진짜 위안이 되다니. 우습지만 따뜻해서 그 믿음을 이불처럼 덮고 자리에 누웠다. 이부자리가 계속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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