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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Sep 26. 2018

네 재개발 철거반 같은 단어들

부숴버리겠어

-

너를 잊어보겠다고 너의 못된 것들을 잔뜩 썼다. 


잔업을 하려 책상에 앉았는데 네가 머릿속에서 돌아다녀서, 견딜 수 없어서. 잔뜩 썼다.

네가 생각날 때마다, 너를 내 기억 속에 불러놓고 이런저런 다정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그래서 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할 때마다. 메모장을 열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효과가 좋았다.



-

메모장에 적어둔 말들은 재개발 철거반 같았다. 

수십 가지 단어와 문장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내 머릿속 다정한 너와 나의 공간을 깨부쉈다. 

거대한 장도리는 환한 햇살에 더욱 반짝거리는 유리창을 깼고, 쇠로 된 방망이는 앤틱한 나무 탁자를 내리쳤다. 아비규환이다. 

나와 네 뒤에서 함께 웃던 엑스트라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났다. 

나만이 그것을 막아서야 하는지, 함께 두들겨 부셔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은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울상인 채로 서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내 앞에 다정히 앉았던 너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너는 이미 없었다. 

'어디 갔지?' 

고개를 돌렸다. 거친 발길질을 해대는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너였다. 수 십 명의 너는 내가 적은 각각의 단어와 문장을 내뱉으며 보이는 모든 것을 사정없이 부수어 대고 있었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은 내가 될 것이다.

내 모든 가짜의 시공이 부서진 뒤에는 현실의 내가 저렇게 부서지겠지.

'아니, 더 이상은 안돼.'


나는 있는 힘껏 눈을 떴다. 흐릿한 모니터와 널브러진 종이들이 보였다.

키보드를 두들겼다. 아직 온전히 남은 유리창이며 덜 쪼개어진 탁자를 부숴버리듯.



-

미련은 아마 곧 다시 머릿속에 모래성을 지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제 재개발 철거반이 있으므로. 조금 더 용기있게 무허가 건축에 대항해보려 한다.

나와 나의 메모장이여, 힘을 내라. 함께 때려 부수자. 그리고 어서 다시 현실에 집을 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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