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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Oct 24. 2018

무채색과 유채색의 도시락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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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싼다.
오빠가 도시락을 싼다.

오빠가 내 도시락을 싼다.

오빠님이 내 도시락을 친히 싸주신다.



-

중학교까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김여사는 워킹맘이었으므로, 도시락을 싸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반찬에 대해 투정하고 싶지 않았다.

김여사의 반찬은 건강식이었다.
무채색의 식이섬유로 이루어진 반찬이었다.
무채색의 반찬들은 겨울 보온 도시락에 들어갔다 나오면 더욱 채도가 떨어지고 숨이 죽었다. 겨울잠을 자듯 푹 죽어 있는 반찬들을 되살릴 방도는 없어 그저 입으로 재빨리 집어 넣을 뿐이었다.
반찬에 대해 투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투정을 하고 있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도시락 뚜껑을 다급히 열어 제치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실 좀 부러웠다. 어떤 아이는 아침부터 자기 메뉴를 읊어댔다. 아침에 엄마가 만드는 걸 보았다고.

나는 하얀 러플이 달린 빨간 체크무늬 앞치마를 한 여자가 넓고 쾌적한 주방에서 화사한 표정으로 튀김용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풍경을 상상했다. 당연 그런 풍경은 아니었을텐데도..


어쨌거나 내 도시락에 대한 기억은 무채색이었다.
딱히 탓하고 싶지도 않고,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한 기억이라 도시락은, 반찬은, 도시락을 싸던 아침의 엄마는, 내게 무채색이었다.



-

새로 일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예 다른 직종으로 옮겼다. 그리고 본가로 들어왔다.


새로운 일터에서의 점심시간은 애매했다. 함께 밥을 먹기도 했지만, 각자의 업무 때문에 각각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밥을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식당이 많지 않아 금새 물렸다.


'도시락을 싸야겠어.'
같은 이유로 가끔 도시락을 싸는 오빠를 보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빠, 좀 더 해서 나도 좀 가져가자."


본디 성품이 다정한 오빠는 도시락을 싸주었다.

계란후라이도 부쳐 주었으며, 김여사가 빚어놓은 동그랑땡을 튀겨주기도 했다. 고추장에 다진 소고기를 볶아주었다. 사실 김여사가 다 장을 보고 빚어 놓고 준비해 놓은 것이긴 하지만,


달랑달랑 들고 간 귀여운 점심도시락을 열면
작은 통에 대충 구워진 계란 후라이가 밥 위에 얹어져 있거나, 노르스름한 동그랑땡이 케챱 모자를 머리에 얹고 줄지어 서 있었다. 어떤 날엔 고추장에 볶인 다진 소고기만 덜렁 들어가 있었지만, 그 다음주엔 그 빨간 볶은 소고기에 초록 노랑 하양 야채가 섞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업무를 옆에 끼고 때로는 허겁지겁 먹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도시락을 먹는 나날이 늘어갈 수록 내 기억 속 도시락 반찬들은 색칠공부를 하듯 여러가지 원색들이 덧입혀졌다.

밝고 선명한 지금의 반찬 색들이 저 너머의 오랜 기억들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 오래전으로부터 밝아오는 빛은 다시 현재의 나를 끌어올려주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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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그러니까.. 소세지 반찬 좀 넣어줘."

소세지 반찬이 먹고 싶어서 이렇게 정성들여 긴 글을 썼는데, 오빠가 알아들어 주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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