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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Oct 25. 2018

지금 사러 갑니다.

로또.

-

'으왓! 똥꿈꿨어!!'


소위 말하는 재수꿈은 거의 꾸지 않는 편이다. 하긴, 자주 꾸면 재수꿈이 아니겠지.

그런데 오늘은 똥꿈을 꿨다. 내가 가는 곳곳이 똥이었다.



-

똥꿈의 특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꾸는 동안은 기분이 좋지 않다.

두 번째, 깨고 나서는 기분이 무척 좋다.


꾸는 동안엔 어떻게 가는 데마다 똥판인가 싶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아, 거기서 변기 레버를 내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그 똥무더기를 피하지 말고 힘껏 밟았어야 했는데..'와 같은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리고는,

'오늘은 로또를 만원 어치쯤은 사봐야지, 회사 앞에 유명한 로또 대박집이 있으니까..' 하며

출근용 자전거를 그 앞에 세워두고 옹기종기 모여 선 사람들 사이에 껴서, 설레는 마음으로 내 로또 종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상은 늘 같다. 

나는 크루즈를 타고 대서양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 썬베드에 누워 한 손에는 바다색과 같은 색의 칵테일을 끼우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 탁자에 올려진 리본 달린 챙 넓은 밀짚모자를 쳐다보고 있는 그런 장면.



-

아 근데.

뭘 사기나 사야, 되든 안되든 하지.


앞에서 말 안 한 게 하나 더 있다. 

첫 번째, 나는 재수꿈을 거의 꾸지 않는 편이며, 

두 번째, 어렵게(?) 꾼 날에도 로또 사는 것을 거의 항상 늘 까먹는다.

오늘도 까먹었다.

젠장.



한 번은 웬일로 저녁때 생각이 나서 편의점으로 사러 갔더니, 토요일이라 저녁 8시 마감이 끝난 뒤였다. 

젠장.


어? 근데 이 글을 쓰려고 마감시간을 검색하다가 평일 마감시간이 밤 12시라는 걸 알게 됐다.

음? 지금 시각 밤 11시 06분.

분홍색 곰 같은 수면바지를 입고, 한껏 번져 번들거리는 눈화장을 눈꺼풀에 여전히 올린 채로 구부정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이럴 때가 아니다. 

나간다. 사러. 로또.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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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토요일 8시 이후부터는 판매부수 대박의 꿈을 꾸며 자판을 다시 두드리는 일이 없으면 참 좋겠다.

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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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각 밤 11시 46분. 

나는 이미 귀가했다. 흘러내리는 화장을 모두 지우고 다시 분홍곰 수면바지를 착장하고 다시 구부정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로또를 얼마어치 샀냐고? 

못 샀다. 젠장.



밤 11시 22분. 

동네 유명 복권방은 이미 문을 닫았고, 동네 편의점에서는 더 이상 로또를 팔지 않았다. 

친절한 편의점의 언니께서 

"밤 11시면 다들 문을 닫더라구요. 기계가 마감되는 것 같더라구요.." 

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편의점을 나와, 한 마리 반딧불이처럼 핸드폰 액정에 불을 환히 밝히며 밤거리를 누볐다.

'가장 가까운 복권방' 및 '왜 편의점에서 로또를 팔지 않는가'에 대해 검색했다.

정부가 편의점의 로또 판매를 금지하느니 마느니 하는 기사가 잔뜩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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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도 사지 못했다.

내게 허락된 로또 번호는 한갯도 없었다.


"벌써 갔다 왔어?" 하는 혈육을 향해, 

"갔다는 왔지. 근데 문닫아서 하나도 못 샀어. 내일 사도 될까?" 하고 진심으로 물었다.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앉았는 혈육의 등 뒤로, 나를 실은 크루즈가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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