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
-
사거리의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는 횡단보도가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도 따라 건넜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고 있을 때, 파란불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고개를 들어 신호등을 확인했다.
-
신호등은 불이 꺼져 있었다.
'응? 신호등이 고장 났는데 사람들이 그냥 길을 건넜단 말인가? 그럼 지금 파란불인 게 맞긴 한 건가? 얼마나 남았지? 빨간불인데 이싸람들이 막 건넌 거 아닌가?'
다급하게 그런 류의 생각을 여섯 개쯤 하려고 할 때 파란불이 들어왔다.
근데 어? 파란불은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금세 또 들어왔다. 파란불은 깜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깜빡거리는, 그러니까 잠깐 꺼져있던, 그 순간의 신호등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파란불이 깜빡거리는 사이,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다섯 가지 생각을 했다.
생각은 빛 다음으로 빠르거나 빛만큼 빠르거나 혹은 빛보다 빠를 것이다.
-
신호등은 그저 깜빡거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남아있던 다급한 마음들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 대여섯 가지의 마음들 역시 곧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나는 맹한 표정으로 또 다른 횡단보도가 걸쳐져 있는 보행자의 섬에 올라섰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내가 느꼈던 시간의 기이함을 곱씹었다. 내게는 긴 시간이었는데, 사실은 그렇게 찰나였다니.
-
주위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신호가 그런 건 아니었을까?
내 삶이 내게 보내는 신호가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한 조각의 손짓과 한토막의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여기고 살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 동안 너무 많은 걸 읽어내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오해는 내가 만들어 낸 건 아닐까..
그렇게 눈을 끔뻑거리며 터지는 생각들을 바라보았다.
창피한 것들이 조금 떠올랐다. 창피한 것들을 몰아내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래, 이제는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지..'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천천히 깜빡이며 건너편 신호등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