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분널뛰기 선수권 대회 챔피언에게

이 질문, 고만.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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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내 인생 망했어' 라며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당장이라도 포르쉐 카이엔을 현금 일시불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다. 오늘 기분이 좋은 건 기가 막히게 좋았던 날씨와 독하고 달콤했던 커피 때문이다. 근데 어젠 왜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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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박'이 실시간 검색어로 등장한 오늘은, 호랑이 시집간 정도가 아니라 장가도 가고 여우도 막 시집 장가를 왔다가 막 갔다가 하고 막 내가 마 느그 서장님이랑 마 사우나도 가고... 아무튼 그런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주룩비가 내리는 날씨를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이를 데 없는 최고의 날이었다. 게다가 나는 석촌호수와 방이동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롯데타워 5층의 한 카페에 있었다. 덕분에 거대한 통유리를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아아.


그 카페에서는 이제 막 아인슈페너를 팔기 시작했다. 안 마실 수가 있나.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맛있다.

쌉쌀한 커피와, 그 색과 맛을 완전히 숨겨주는 순백의 크림. 단짠단짠 이상의 파괴력을 보이는 이 쌉달쌉달의 조화는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커피잔을 홀짝이게 만들었다. 때문에 나는 카페인 부작용으로 여섯 시간 넘게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다이어트에 막 성공해서 48킬로가 될 것 같고, 그러자 갑자기 인생이 막 즐겁고 만사가 막 형통해버려서 카이엔 키가 내 손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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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 그래, 일단 지금은 날씨랑 아인슈페너 때문에 그렇다 치고, 어제는 왜 그랬지?'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제는 ‘망'했다가 오늘은 ‘요들레이히히히히’ 하는 모양새로 보아, 세상 못 믿겠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기분'이다. 뭐야 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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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라는 것, 자꾸 변하니 당최 믿을 수가 없다. 그럼 날씨처럼 자꾸만 바뀌는 이 기분 말고, '변하지 않는 뭔가가 내게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실은 예전부터 가졌던 의문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일기 너머엔 변함없는 하늘이 있듯, 내게도 이 기분 너머 변함없는 뭔가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변함없는 것이 내 존재의 실체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무언가를 오랫동안 찾았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여 나도 따라 여러 가지 책을 읽고, 그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그리고 문득, '텅 빈 충만함'이라는 표현이 가슴으로 성큼 들어왔던 날을 만났다. 나는 내가 느낀 이것이 아마도 '변함없는 것', 그리고 내 '밑바탕' 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만 하고는 내버려 두었더니 금세 또 엉망이 되었다.

먼지는 부지런히 내려앉고, 먼지 냄새를 맡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먹구름들은 거기가 제 집인 줄 알고, 지네 집에 안 가고, 그럼 나는 또 내 본바탕이란 건 원래 어두운 건갑다 생각해버리고.. 그래서 계속 내버려두고. 그랬다. 쓰다 보니 참회록 같은데, 그렇다. 참회해야 한다. 내 하늘을 내버려 둔 것이 내가 지은 죄 중 가장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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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변하는 날씨에만 시선을 꽂아 이러쿵저러쿵 하던 나를 떠올린다.

구름은 왔다가 떠나고, 비는 내렸다 멈춘다. 그 뒤편의 변치 않는 하늘은 깡그리 잊고, 왔다 갔다 하는 날씨가 나인 양 그렇게 일희일비한다. 구름을 부르고 비를 부르는 것이 나인 것 또한 당연히 깡그리 잊어버리고..


오늘의 비도 구름도 우박도 끝내는 지나갔다. 내가 기대야 할 것은 무엇인가. 비인가 구름인가 우박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의 뒤편인 텅 빈 하늘인가. 쉬운 질문을 지겹게도 던져댔다.

이제 널뛰기판에서는 그만 내려오자, 그리고 이 질문도, 오늘 이후로 더 이상 꺼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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