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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이 중요한가 뭐?"
그렇게 살아왔다. 기념일이란 건 여유 있는 사람들이 부리는 사치라고.
그러나 세리머니가 원체 중요했던 전 직장에서 십 년 가까이 일하고 나니, 기념일을 대하는 나의 생각과 태도가 자연스럽게 완전히 바뀌었다. 기념일이란 스쳐지나가는 하루에 의미를 심어주는 모내기 같은 것. 하여 퇴직 후 본가에 돌아온 후부터는 열심히 가족들의 크고 작은 기념일을 챙겼다.
자기 생일도 그냥 지나 보내던 가족들은 머쓱해했지만, 싫진 않은 표정이었다.
반복 학습이 거듭되자 자발적으로 케이크를 사오는 날이 왔다.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기념일이란 참 좋은 것이군."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쯤 되니 가족들은 서로 나서서 기념일을 챙겼다. 열심히 챙기다 보니 기념일이 꽤 자주 찾아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엔 내가 조금 머쓱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김여사는 매주 금요일을 불금으로 설정하여 기념일화 한 것에 멈추지 않고, 불금을 기준으로 목요일과 수요일을 각각 불금 전날, 불금 전전날로 설정했다. 새로운 기념일이었다. 하루 걸러 하루가 기념일이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기념일 전도사인 나의 졸업식 날을 모두가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복학을 결심하던 그날부터 졸업식날을 물었다.
"글쎄, 2월 언제쯤이겠지?"
12월부터는 거의 매일 졸업식 날짜를 물었다.
학교에선 아직 공지가 없었다. 학과 사무실에 전화해보라는 가족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졸업식 날짜로 유난 부리는 늙은 복학생이 되고 싶지 않아 이리저리 대답을 미루었다. 졸업식날을 2주 앞두었을 때 다행히 학교에서 안내 문자가 왔고, 아버지와 오빠는 근무시간을 조정했다.
'와..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축제의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민망함을 숨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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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날.
생각지도 않게 동기들이 와줬다. '무슨 졸업식엘 오냐', '장난치지 말라'던 게 무색하도록 나는 크게 웃었다. 서로 학사모와 꽃다발을 돌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박사과정 때문에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김회장은 그동안 무수히 많은 선후배 동기들의 졸업사진을 찍어주며 졸업사진 촬영에 도가 터 있었다. 김회장은 학교 내 랜드마크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장 졸업식스러운 포즈를 가장 졸업식스러운 구도로 찍어주었다. 김회장의 영도 아래 우리는 추운 날씨 속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코스는 도서관이었다.
아버지에게 학사모와 가운을 입히고 독사진을 찍어드렸다. 본인이 학사모 쓰고 사진 찍을 시간이 없을까봐 내내 발을 동동하시더니만 막상 사진 찍을 때가 되자 어색하셨다보다. 아버지는 어렵게 어렵게 웃었다. 아버지가 귀여워 우리는 더 크게 웃었다. 대학 다니는 젊은이 한 명 나오기 어려웠던 시절에 살던 당신이라 생각하니 그 낯섦과 설렘이 이해된다. 아버지 사진 크게 뽑아서 방에 붙여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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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꽃다발을 정리하고 뒤늦게 방에 들어섰다.
책상 위에는 그새 오빠가 펼쳐둔 학위증이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다.
'거참, 저 종이 한 장이 뭐라고.'
별생각 없이 들어간 학교,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했던 시간, 단 두 학기를 남겨놓고 학교를 떠나버렸던 20대 초반, '졸업이 뭐 그리 대수라고.' 하며 학교는 안중없이 일에만 몰두했던 10년, 그러면서도 언젠간 졸업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에 내 마음을 겹쳐두었던 시간들, 퇴직 후, 일하기 싫어서! 서른 넘어 복학을 시도한,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두 학기를 무사히 마친 지난 1년이 스쳐갔다.
기억들을 지나쳐 보내고 학위증을 쳐다보니, 서 있는 모양새가 무슨 문 같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문을 지나왔구나, 그리고 또 저 문도 무사히 잘 지나왔구나 싶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저 많은 문들을 잘 지나왔구나 싶다.
다 내가 잘해서 잘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 '내가 한 게 내가 한 게 아니다'라는 말의 뜻을, 나보다 더 기뻐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며 내가 더 기뻐지는 것을 느꼈다. 내 기쁨을 보고 당신들이 거기에 얹어 또 더 기뻐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웃음이 불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와 당신,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우리가 더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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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있었던 졸업식이 벌써 전생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오늘 저녁 닭강정을 사 오시겠다 한다. 날도 추운데 뭘 사러 가시냐 물으니 막내가 졸업을 했기 때문이란다. 오빠랑 크게 웃었다.
그래요 아버지, 원래 졸업 같은 거 하면 졸업 날 앞뒤로 일주일간은 축제주간이죠, 네네 맞습니다. 다음 달 30일엔 아버지 생신이니까, 1일부터 파티를 해요. 원래 생일 있는 달은 한 달 내내 축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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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축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너무 늦게 배운 걸까? 뭐, 좀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지금부터 내내 축제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