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도곡동 전기드릴 삭제사건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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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그 날이 왔다. 깎는 날. 전문용어로 치아삭제의 날.

무덤덤한 담당선생님의 성격 덕분으로 나는 늘 어떤 진료를 받게 되는지 알지 못하고 치과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것이 느닷없고 급작스러운 느낌이 될 때가 많아, 서프라이즈~ 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사실 그걸 알아봐야 뭐하겠는가. 깎고 조이고 땡기고 뭐 그런 것들인 것을. 다행히 그 선택지에 '뽑기'(발치)가 없는 것이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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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치과에 갔던 그 날,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여러가지 드릴헤드(!)를 가지고 온 의사선생님이 아직 드릴(!)을 구동시키기도 전에 나의 이빨은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나의 마음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 이므로 어떠한 앙탈도 할 수 없이 그저 뻣뻣하게 진료의자 위에 누워있었다.

이윽고 드릴은 돌아가고.. 드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나의 이빨이 정말로 떨리기 시작했다. 의사선생님은 헤드를 몇 번씩 바꿔가며 이렇게 저렇게 나의 이빨을 갈아내고 있었다. 살점도 아니고 무려 생 뼛가루가 갈아떨어져나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력감을 작은 한숨으로 일곱번쯤 뱉어내고 나니 치아삭제가 마무리 되었다. 간호사가 나에게 쥐어준 거울을 통해 왜소해진 이빨들을 보았다. 이빨들을 따라 나도 의기소침해졌다. 흑.


*의기소침해진 이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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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일부를 잃은 이빨들은 예민해졌다.

찬물은 물론 단 것들도 견디지 못했다. 대강 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갔던 날이었다. 책을 조금 뒤적이다 목이 말라 싸온 물을 한 모금 물었다. 찬물을 먹지 못하니 상온의 생수를 따로 담아 온 것이었다.

우악!


조용한 도서관에서 소리나 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까 이를 갈아낼 때 느꼈던 시림이 섬광처럼 번쩍 하고 나타났다. 눈앞이 정말로 번쩍했다. 초등학생 때 깜깜한 성당안을 전력질주하다 출구 바로 옆 벽에 정통으로 들이 받았을 때의 그 섬광을 이십년만에 다시 보았다. 인생이 참으로 섬광같다..응?


그러고보니 아까 치과를 나올 때 의사선생님이 미지근하게 먹으라고 했던게 기억났다.

근데 이거 미지근한건데요? 이상하다 싶어 한모금 더 먹어보았다.

우악!

나는 섬광을 한번 더 보았다.

물은 확실히 미지근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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