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수밖에
-
<그대 나의 뮤즈> 라는 전시에 갔다.
19세기 화가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구성한 전시였다. 반짝거리고 다이나믹한 것을 좋아하는 김여사의 취향에 맞을 것 같아 함께 다녀왔다.
전시장에는 고흐, 르누아르, 카유보트, 클림트, 마티스의 작품이 있었다. 고흐가 그렸던 밀밭의 밀이 실제로 있었고, 향기도 났다. 하늘의 구름은 감기거나 풀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고흐가 그린 태양은 큰 방의 한 면에서 시작되어 다른 양쪽 두면까지, 3면을 가득 채워 이글거렸다. 조용한 음악과 함께 진한 노란색과 주황색이 나를 덮쳐오듯 점점 타올랐다. 그 빛에 몸이 익어가는 듯했다. 자질구레한 감정들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살균 박멸되어 온통 텅 비고, 그 빛으로 충만해지고 압도되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르누아르의 사람들은 예쁘게 치장하고 춤을 추거나, 노를 저으며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유보트의 방에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우리는 파리 사람들처럼 비를 피해 다음 방으로 건너갔다.
옆 방에는 마티스가 있었다. 마티스의 고양이들이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마티스의 종이조각은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김여사와 나는 아이처럼 몸을 쭉쭉 뻗어 움직였다. 그리고 깔깔거렸다.
전시를 보고 나와 아트샵에 들렀다. 요즘 색에 관심이 많은 김여사에게 어른을 위한 컬러링북을 보여줬다. 가지고 싶어 해서 고흐 버전으로 샀다.
지하 1층 테라로사에 갔다. 커피 한잔과 바나나브레드를 시켜 나눠먹었다. 커피 향이 기가 막힌 데다가 바나나브레드가 또 기가 막혔다. 바나나브레드와 단호박크림치즈머핀을 더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김여사가 물었다.
"뭐가 제일 좋았어?"
"난 태양. 충격적일 정도로 압도적이었어."
"나도. 태양의 색감이랑 파장이 정말 대단했어."
"또 뭐가 좋았어?"
"아몬드꽃. 조카 주려고 그렸다는 게 기억에 남아. 그리고 침대 위에서까지 작업하던 마티스 영감도."
르누아르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고흐랑 마티스 영감님 얘기만 한다. 의외군. 어쨌든 전시가 무척 맘에 들었던지, 김여사는 집에 돌아와 잔뜩 찍은 동영상과 사진을 한참 감상했다.
-
나도 고흐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나는 늘 연필로 연하게, 색칠은 낮은 채도로, 물을 잔뜩 타서 그렸다. 원색은 불편했다. 하지만 고흐에게만은 달랐다. 선명한 색깔과 대담한 터치를 보면 속이 다 시원했다. 이후 알게 된 그의 생은 강렬한 색감의 작품과 함께 더욱 극적인 대비감을 주었다. 나는 고흐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모사를 하는 미술시간이면 고흐의 것을 그렸다. 고흐의 그림은 강렬했고 어지럽고 우울했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좋았다. 그러나 그의 생을 떼어놓을 수 없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저 세상의 고흐는 이상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마음이 가벼워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된다.
김여사도 그런 것 같다. 고흐가 서른일곱에 자살하고, 동생 테오가 그다음 해에 세상을 떠난 것을 그렇게 마음 아파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떠올리며 김여사는 말했다. "글씨도 잘 쓰는 양반이 그렇게 갔어."
미술관 오는 길에 삼성역을 지나쳤다. 삼성역의 SM은 건물 외벽을 통해 종현의 유작을 광고하고 있었다. 김여사가 고흐를 얘기하던 표정은 그 광고를 볼 때와 같았다. 나는 마음이 한번 더 아팠다.
-
BBC 드라마 <닥터후> 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흐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를 조금 본 적이 있다. 외로운 고흐가 미래로 와서 사랑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우는 장면이었다. 김여사를 위해서 저걸 다시 찾아봐야겠다 싶다. 김여사에게 보여주고, "봐봐, 고흐는 알고 있을 거니까, 행복할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김여사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고흐 작품에 색칠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종현이는? 그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당분간은 계속 그냥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그저 앞으로는 아무도 힘겹게 세상을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밖에. 어둠을 사르고 거두는 태양빛을 마음으로 보내는 수밖에. 고흐를 그의 눈부신 햇살로 기억하듯, 아이를 그의 좋은 노래로 기억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