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한 냉장고 자석_ 5

그럴 것 같아서.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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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기분이 이상하지? 더 이상 그렇게 여행을 다닐 수도 없고, 그때 그 사람들도 없고..

그치만 딸. 지금의 네가 그때의 너를 보며 좋을 때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엄마가 보기에 너는 지금 참 좋은 때야."

"... 그럴까?... 엄마 말이 분명히 맞을텐데, 마음에서는 잘 모르겠어."

그때도 분명 머리 터질 것 같은 고민이 있었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세월은 기억을 조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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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로 돌아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화덕피자를 한판 먹고, 엄마와 내가 좋아하는 호텔 수영장에서 목만 내어놓고 수영을 하고, 동문시장에 가서 광어, 딱새우, 천혜향 주스, 오메기떡.. 먹을 것을 잔뜩 사서 실컷 먹고, 사진을 찍고, 웃고, 폭신한 침대에 몸을 묻고 잠들고, 세상 좋아하는 호텔 조식을 먹고,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을 기다렸다. 무엇하나 틀어짐 없는 깔끔한 여행. 게다가 이번 여행은 엄마와 나 사이 작은 다툼, 작은 짜증 한번 없었다.

그러나 울적한 기분이 여전하다.

즐거웠는데. 즐겁게만 다녀오고 싶었는데, 그래야 또 가볍게 나서는데..


화장실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공항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다 벌떡 일어났다. 방금 들어갔다 빈손으로 나온 작은 기념품 가게에 다시 들어갔다. 즐거운 기억일 때만 사기로 했던 냉장고 자석. 가장 마음 가는 것으로 골라 씩씩하게 계산하고 나왔다. 밤의 한라산과 그 아래 작은 마을을 초생달과 유채꽃이 밝게 비춰주고 있는 그림이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엄마가 물었다.

"뭐 샀어?"

"응, 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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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뭣하러." 하고 말하고 싶었을 텐데, 엄마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석이 담긴 작은 종이봉투를 가방 앞주머니에 아무렇지 않은 듯 찔러 넣으며,

"행복하기도, 힘들기도 했던 그 기억들이 늘 현재인 것 마냥 생생하게 느끼고 살았는데,

한참을 지나와 이제야 그게 정말로 다 지나가버린 옛 일이란 걸 확인하니, 난 영 마음이 헛헛해. 엄마도 그렇지?

엄마가 살고 내가 태어났던 그 산골과 작은 개울, 막 대학생이 된 내가 처음 밟아본 섬에서 맡았던 촉촉한 흙냄새 같은 것들 말이야. 그게 좋았건 싫었건 간에. 이제 그건 다 전생인 걸 알았으니까...

전생을 전생으로 잘 남겨두고 싶은데 내가 좀 질척거리는 스타일이잖아? 그게 어렵네? 오랜 기억, 비로소 그걸 떼놓을 수 있게 된 엄마와 나. 아 나 이거 영 쓸쓸해서.. 그래서 이거 하나 샀어. 엄마 여기 봐봐. 여기 한라산 꼭대기에 초생달이 있잖아? 초생달 주제에 저 큰 산을 막 밝히고 있어. 저 유채꽃도. 고작 꽃 몇 송이뿐인데 밤이 어둡지가 않아. 하늘도 밤이라 새까말 것 같은데 안 그렇다? 보라색, 자주색, 분홍색 막 그라데이션 좀 봐. 곧 밝아진다는 뜻 아니겠어? 내가 보라색 좋아하는 거 알지? 그리고 여기 산 밑에 집들 말이야. 엄마가 이렇게 살았다며. 산골에 막 집도 뜨문뜨문 있고 막. 근데 봐봐, 여기 초생달이랑 한라산이랑 꽃이랑 막 있어서 집들이 안 외로워 보이잖아. 그치? 그래서 이거 샀어. 이거면 다 따뜻하게 남을 것 같아서."


라고 속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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