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로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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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갑자기 셔츠 붐이 일었다. 나뭇잎사귀가 그려진 셔츠, 콜럼버스가 어느 대륙에 도착한 해가 수 놓인 셔츠 등 다양한 브랜드들의 춘추전국시대였지만 셔츠라는 카테고리의 간지는 말자수과 자전거 자수로 대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망을 반영한 다리 세 개 달린 말, 머리가 못생긴 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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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나 신대륙 도착 연도가 적힌 셔츠들을 입다가, 나도 말 한번 타보고 싶어서 용돈을 모았다. 열심히 모으다 안될 것 같아 고3인 지위를 이용, 엄마를 약간 협박하였으나 내 뜻처럼 되지 않았고.. 도저히 말을 장만할 형편이 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다리 세 개 달린 말은 싫어서, 나는 결국 자전거 자수를 파는 집에 들어갔다.
‘한 벌뿐이니까 눈에 너무 띄는 색깔은 안돼. 그치만 남색이나 베이지색은 너무 흔하잖아.’
나는 붉은 끼나 파란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감 좋은 보라색 셔츠를 골랐다. 채도 또한 알맞아 너무 눈에 띄지도, 너무 은은하지도 않았다. 예쁜 것. 오래도록 아주 잘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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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 되고도 한참이나 지났던 어느 늦가을, 랄프로렌 매장 앞을 지나다 전시된 마네킹에 말셔츠를 입던 학교 아이들의 얼굴이 합성되듯 떠올랐다. 베이지색, 남색 같은 클래식한 색깔부터 처음 보는 청록색까지. 와 저런 색도 있네? 하며 신기해하다 들던 부러운 마음과 부러운 마음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던 나까지.
나는 매장으로 성큼 들어가 짙은 청색의 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사이즈가 어떻게 되나요?”
점원은 사이즈가 다른 두 장의 셔츠를 건넸다. 탈의실에서 나온 나는 망설임 없이 셔츠를 샀다.
“포장해드릴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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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다. 상자를 둘러싼 초록색과 노란색 줄무늬 리본을 풀고, 얇고 날씬한 남색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속지를 넘기자 짙은 청색의 셔츠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설마? 하며 말다리의 개수를 세어보다 종아리며 발굽의 자수의 섬세함을 발견하고 약간 경탄하며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다, 좀 모양 빠지는 것 같아 엣헴, 하고 최대한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셔츠를 꺼내 거울 앞에서 걸쳤다. 나뭇잎도, 네 자리 숫자도, 크기가 다른 바퀴 두 개 달린 자전거도 아닌 다름 아닌 늘씬한 말이 빳빳한 셔츠 위에서 달그락달그락 달리고 있었다. 말을 가만히 쳐다보다 생각했다.
_ 아, 나. 진짜 어른됐나?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직장인이 된 지도 벌써 수년이 흘렀는데, 이런 생생한 어른의 기분은 처음.
_ 고작 말 무늬 셔츠 하나에?
그러게. 어릴 적 꾸었던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게 어른이 되는 길이라 생각해왔는데, 작고 사소한 소망들을 내 힘으로 꾸준히 성취해가는 것이야말로 어른에의 길이 아닐까 싶어 졌다. 아. 내가 그걸 모르고 세계평화를 위해 달려만 왔구나..
_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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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펜 펜촉을 사고, 입고 싶었던 치마를 사고, 그림을 배우고, 엄마와 커피를 마시고..
그 뒤로 나는 대단치 않은 일들을 했다. 시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이었다. 사소한 소망들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소망 리스트를 하나씩 지우며 나는 그동안 몰랐던, 혹은 모르는 척했던 나의 욕구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괴롭히던 이름표 없던 마음들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었다. 이름표를 붙이자 정말로 별 것 아닌 것과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자동으로 나뉘었다. 정말로 원하는 것들에는 순서를 매길 수도 있었다.
_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일이 아닌가?
그림일기를 그리고 잠자리에 드는데, 저 생각에 마음이 우쭐하다 설레졌다. 꼭 마음이 다그닥다그닥 말을 타고 어디 넓은 대평원을 달리듯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