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아이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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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굴러다니던 광고지 뒷면에 좌우 길이가 다른 아방가르드 스커트를 그리고 그 유니크함에 스스로 탄복하던 6살 꼬마는 제가 커서 당연히 패션 디자이너나 화가가 될 줄 알았으나 그것과는 좀 다른 일들을 업으로 하며 살아왔다. 뭐 그것들도 꿈꿨던 것들이긴 하지만, 최초의 소망이었던 저것의 로망은 늘 사라지지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이패드를 샀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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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의 나와, 그다음 달의 나와, 그 다음다음 달의 나.. 이렇게 미래의 내가 몇 명 모이면 못 살 것이 없으므로, 카드사가 허락하는 무이자만큼의 친구들을 모아 아이패드를 샀다.
아아 아이패드..
아직 우리 집 책꽂이 어딘가에 박혀있는 아이패드 2세대의 대리석같은 무게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나는 그보다 무려 몇 인치나 더 큰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의 한낱 솜털 같은 무게에 기함을 토하다, 애플 펜슬의 딜레이 없는 반응과 그대로 전달되는 필압에 전율을 느끼던 중 패드에 그려진 내 그림을 발견하고 말문을 닫았다.
... 내 그림, 꽤 못생긴 편.. 이 패드, 너무 진실한 편...
그렇다면 어플을 쓰면 되겠지 싶어 (음?) 프로크리에이트라는 만 얼마짜리 어플을 사고, 또 그렇다면 케이스를 사야지, 종이질감의 액정필름을 사야지, 애플 펜슬 케이스를 사야지 하고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액세서리 쇼핑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거 산다고 그림 열심히 그리겠냐'는 주위의 우려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연금술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