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아이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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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아이패드를 보며 죄책감을 한 겹 한 겹 쌓다 큰맘 먹고 뚜껑을 열었다.
무슨 방화문도 아닌데 그렇게 무겁게 열 일인가 싶었지만 어쨌든 열었다.
"회사일이고 독감이고 다 핑계지.. 그래~ 아우 그럼, 나도 그렇게 생각해.. "
패드는 말이 없는데 혼자 면구스러운 마음에 넉살 좋은 척 말을 늘어놓으며 뚜껑을 열었다.
'아... 너무 새 거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 음?
그런데 뭘 좀 그려보려고 했더니... 아 네 밧데리가 없네요.
펜슬을 붙여놓은 상태로 보관하면 밧데리가 며칠 가지 못한다는 귀중한 사실을 이렇게 또 굳이 체험을 통해 배운 뒤, 다시 충실히 충전을 하였다. 그림 한번 그리기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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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수시로 밥을 주고, 뚜껑을 열어보고, 패드의 낯빛을 살피며 매끌매끌한 펜슬을 한번 더 쥐어보는 사이, 데면데면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아니 선생님, 그동안 낯가리셔서 사용을 안 하신 거냐고요.'
마음속에서 누가 말을 자꾸 거는데 그건 모른척하고 만 얼마 주고 샀던 어플을 열었다. 색연필, 연필, 페인트, 목탄 등 갖가지 브러시와 팔레트 속 세상 모든 색을 다 클릭해보고 획을 그어보며 가장 마음에 드는 질감의 브러시와 그 크기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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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부터 그려보는 게 좋겠어.
식구들의 캐릭터를 하나하나 그렸다. 엄마는 성격이 전혀 양 같진 않지만 머리카락이 풍성한 걸 좋아하니까 양으로 그려주고.. 아빠는 몸매가 날렵하고 얼굴에 재기가 가득하니 원숭이로 하고.. 오빠는 아빠 같으니까 젊은 원숭이로 하고.. 나는 회사 가기 싫으니까 유령으로..
정말 소박하기 짝이 없는 그림인데도 가족들의 특징을 담아내려 심혈을 기울였으므로 컨펌 아니고 자랑을 하려고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가족이라고 막 가족 어드밴티지 남발하는 그런 따뜻한 사람들 아닌데 내 그림을 되게 좋아한다. 아 진짜 왜 좋아하지? 아무래도 그냥 자기를 그려서 좋아하는 것 같다. 자기애 깊은 사람들..
그렇게 자신들이, 함께 먹었던 음식이, 나누었던 대화들이 삐뚤빼뚤한 그림으로나마 어떤 형태를 가지고 남겨지니 그게 무척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이 호불호 심한 사람들이 내 작업의 진척을 묻고, 몇 편까지 업데이트되었는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아 이게 아닌데? 상당히 귀찮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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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어찌어찌 낑낑대고 그리면 또 그걸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이 방 저 방으로 뚜껑 열린 패드를 들고 간다. 나에게 쏟아낼 찬사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을 패드와 같이 들이민다.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웃는다 싶으면 나는 또 한 장을 더 그릴 기세가 되어 마음이 급해진다. 오른손으로 펜슬을 조몰락조몰락한다.
반면 반응이 약간 심드렁하다 싶으면 왼손을 내밀어 얼른 패드를 빼앗아갈 자세를 취한다.
_ 아니 선생님께서 제가 의도한 바를 잘 못 읽어내시는 것 같은데요.. 이 례술이라는 것은 말이에요...
라고 당장이라도 삐죽거릴 것 같은 막내의 입을 막기 위해 가족들은 흠흠, 하고는 "재미있네" 정도의 시쳇말을 던진다.
흥, 나도 그거 시쳇말인 거 알그등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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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투덜거리긴 하지만, 사실 방청객 리액션이건, 시쳇말이건 그건 그림 그린 뒤의 플러스알파, 콘푸로스트를 사면 사은품으로 껴주는 플라스틱 반찬통 같은 거다. 대단할 것 없는 낙서에 가까운 그림이지만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구현하는 일은 마치 마법 같고, 그 세계에서만큼은 무엇이든 창조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만이 진짜 내 세상 같아 가슴이 벅차오를때도 있다. 내가 이런 기분일진대, 만약 창조주가 있다면 그분께서는 아주 짜릿하시겠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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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로 어쩔 수 없이 샀던 150만 원짜리 아이패드는 정말 잘 샀다.
여전히 매일매일 바지런히 그리지는 못하지만, 아이패드가 책상 위에 떡하니 있은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아이패드의 방이 있어서 짬짬이 소재를 모아 두고, 그리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업 해둔다. 좀 거하게 말하자면 '늘'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점점 더 자주, 많이, 즐겁게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하찮은 귀여움에 그치는 나의 그림들이 조금씩 더 풍성해지거나 단정해질 것이다. 그것들이 나의 세계를 구성하므로, 나의 세계 또한 조금씩 더 풍성해지고 단정해질 것이다. 김칫국 드링킹인가? 아니다.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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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제의 나와, 다 같이 힘을 모은 지지지난달의 나와 그 전 달의 나와 그 전전달의 나와 그 전전전... 아무튼 다들 잘했다. 그 모든 나의 노고를 치하하며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 애썼다..
그런데 말이지.. 우리 이제 할부의 한 계절을 끝냈잖아? 그럼 이번엔 카메라는 어때?
'모든 출구는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영국의 극작가 톰 스토퍼드가 그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