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치 매니아_ 파우치를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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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제게는 역마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이렇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일이 없을 수 있나요."
늘 출장이나 연수를 다니던 삶이다. 예전에도 썼지만 나의 시대는 가방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책가방에서 이민가방으로, 이민가방에서 오래된 샘소나이트 캐리어로, 신소재의 형광 노랑 캐리어에서 배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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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동을 위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이동만큼 풀기 위해 싸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무슨 차이냐. 이동을 최고의 목적으로 둔 동료들은 캐리어를 세탁물 바구니처럼 사용하곤 했다. 옷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에 던져 넣을 뿐이라는 것. 그러나 다시 푸는 것에 목적을 둔 나는 캐리어를 서랍처럼 사용하곤 했다. 그건 내가 대단히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사람 이어서라기보다는, 정해진 자리에 두지 않으면 어디다 뒀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지런히 개어서 캐리어 내부의 자체 칸이나 쫄쫄이 벨트로 고정을 하여도 이리저리 움직이고 뒤섞이기 마련. 거대 지퍼백을 사용하여 정리하는데도 지쳤을 때쯤, 백인백 파우치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이야-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구먼.'
숄더백이나 여행용 캐리어를 위한 파우치들은 1300케이나 텐바이텐 같은 디자인 문구 쇼핑몰에 속속들이 입고되기 시작했고, 용도에 따른 다양한 크기, 소재 등이 나왔다.
20인치 캐리어를 위한 3가지 사이즈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단면 메쉬 케이스를 구입하여 사용하다, 여행 중 발생하는 빨랫감의 처리를 위해 메쉬/밀봉 케이스 각각이 양면에 달려있는 케이스를 사이즈 별로 구입했다.
'아, 이렇게 옷도 정돈을 하니 참 좋은데 세면도구도 정리해야지..'
치약 칫솔 샴푸린스 등을 한 칸 한 칸에 따로 정리해 넣을 수 있는 세면도구 케이스를 샀다.
'아 이렇게 정리하니 참 좋네.'
장기 출장 때는 속옷도 많아서 정리가 안되니 한 칸 한 칸 따로 수납할 수 있는 속옷 케이스..
전자기기 충전기도 한 타래가 되니 충전기 케이스.. 아이패드와 노트북은 말할 것도 없고..
쓰다 보니 거 참 투머치 하다마는 나는 정말로 이 파우치들을 사랑했다.
캐리어를 열면 파우치 단위로 묶인 짐들이 얌전히 담겨 있으므로 무엇이 어느 파우치에 들어있는지 쉽게 예상 가능하다. 옷/세면도구/전자기기 등이 확실히 나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먼저 입을 옷과 나중에 입을 옷도 파우치에 분류해두기 때문에 물건이나 옷을 헤집을 필요가 없다. 일정 중에 생기는 세탁해야 할 옷과 가져왔던 새 옷들도 확실히 분리할 수 있으므로 숙소 환경도 쉽게 정돈된다. 돌아올 때도 원래 정해주었던 자리에 친구들을 넣으면 되므로 짐이 터무니없이 불어나는 일도 없다. 파우치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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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만두면서 이 다양한 파우치들을 골고루 사용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렇게 엉덩이 붙이고 사는 나를 보며 삶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신기해하다,
문득문득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당분간은 엉덩이를 땅에 바짝 붙인 채로, 여행 가방보다는 내 공간과 내 일을 정돈해야 할 것 같다.
그럼 자주 사용하지 않는 파우치들을 처분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아무래도 더 가지고 있는 것이 알맞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