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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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왜에? 가야금 있잖아 너."
"아니야! 처음은 거문고였어."
무슨 엇나간 사랑고백 같은 말인 거 알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처음엔 거문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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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는 국악인이었다. 대학에서 거문고를 전공하였는데, 연주하는 모습을 곁에서 자주 볼 일이 있었다.
국악기 중 현악기는 그 라이브 연주는 물론 악기 자체를 그렇게 가까이서 볼 일도 잘 없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은_ 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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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혹시.. 거문고 라이브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거문고 연주자들 보면은 오른손에 가느다란 막대기 쥐고 있잖아요, 그 술대라고 하는.. 그게 줄 여섯 개를 인정사정없이 내려치고 뜯거든요 막? 그러면 줄들이 막 끊어질 것 같은데 그걸 다 버티면서 나무통을 막 울리거든요. 그 와중에 술대가 몸통에 탁! 부딪치는데 그 순간 장구 반주가 딱 맞아 들면, 와... 심장이 따라서 폭삭 내려앉는다니까요. 그 일렉기타 연주할 때 암(Tremolo arm) 쓰면 바이브레이션이 걸리면서 소리가 막 우웅우웅할 때! 그때 심장이 덜컥덜컥하는 그런!
아.. 저는 거문고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을 때 딱 느꼈어요. 거문고는 필시 조선의 일렉기타였을 것.. 이거시 조선의 락스피릿이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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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하는 것에는 강한 인력(引力)이 있다. 나도 끌려갔다.
"저.. 저도 이거 한 번 해볼 수 있을까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동료가 짚어주는 한음 한음을 따라 술대를 이쪽저쪽으로 밀고 끌어올리니 어찌어찌 아리랑 한곡이 완성되었다. 술대를 컨트롤하기는커녕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단단히 고정하는 것만도 쉽지 않았으나 그 자그마한 막대기로 단단한 줄들을 거침없이 긁는 동작만으로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너무 멋있어요! 저도 배우고 싶어요."
"음.. 근데 너는 손이 작고 손의 힘이 약한 편이라 가야금이 배우기 더 나을 거야.
가르쳐주는데도 가야금이 거문고보다는 더 많을 테고... 일단 동네에서 배울만한 곳을 찾아보고, 마땅한 데가 있는 악기로 정하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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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야금을 배우게 된 것이다.
실제로 가야금은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수업이 많이 개설되어 있으며, 거문고만큼의 파-워-를 요구하지는 않아서 배우는 데에 애로사항이 있지는 않았다.
가야금을 시작하게 되면 기본 주법들과 몇 곡의 민요를 배우게 된다.
주법이 익숙해지면 산조(독주 기악곡)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나도 보통 첫 산조곡으로 많이들 접하는 <성금연류 짧은 산조>로 산조를 시작했다. <성금연류 짧은 산조>를 모두 배운 뒤에는 선생님을 따라 <김죽파류> 산조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거취를 옮기게 되어 나의 가야금 배움은 김죽파류 산조 중모리에서 그치게 되었다.
하지만 왼손으로 줄을 위아래로 흔들 때 생겨나는 소리의 그라데이션이 얼마나 황홀한지.
가야금 줄을 뜯으며 나는 각 줄이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와 가장 낮은 소리, 그리고 그 사이의 수많은 소리의 층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즐거움에 홈빡 빠져들어 혼자서도 제법 가야금을 즐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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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래도. 첫사랑은 거문고다.
가야금을 하면 거문고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거나 최소 사그라들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여전하더란 말이다.
가야금에도 박력이 있지만, 나는 줄을 터트려버릴 것처럼 거침없는 술대의 기개, 뭐든 부수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을 그 호쾌한 액션이 늘 그립다. 그러나 '가야금도 있는데 가야금이나 더 해보지 뭘 또 일을 벌이려고 그래.' 하는 생각에 레슨 받을만한 곳을 검색해보기만 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내 연봉 상승과의 상관관계가 하등 1도 없는 너.. 점점 더 멀어지는 너.. 멀어지는 만큼 (나 혼자) 애틋해지는 너와 나의 거리..
언제쯤 거문고를 잡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곁에는 아직 줄도 이어주지 못한 가야금도 있고..
그치만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너에게만큼은 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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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창작곡 <달무리>
연주자 : 고보석
곡 설명 및 박력구간은 3:30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