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 한번 해주세요_ 가야금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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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실 가야금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내 가야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저렴이 연습용인데도 조율하러 가면 조율해주시는 선생님들께서 구입가의 세 배쯤 되는 가격을 부르시곤 "이 정도 주고 샀지요?" 하신다. 물론 그 가격도 가야금 시세에 비하면 저렴이이긴 하나,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아니요, 이게 가격이.. " 하고 내가 지불한 가격을 말하면, 잘 샀다고 잘 샀다고 그렇게 칭찬들을 하신다. 연습용 가야금 중에서도 최저가이지만 소위 말하는 '뽑기'를 잘한 것. 하여 연습을 떠나, 그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것이다. (음?근데 왜 연습은 자꾸 떠나니..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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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야금을 사서 배웠던 때는 근처에 유명한 국악사가 많아 가볍게 들러 조율을 하곤 했다. 한번 조율하고 나면 얼마나 줄이 땡땡하고 소리가 좋은지, 국악사를 다녀오면 시들시들하던 가야금도, 가야금 소리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런데 이사 후에는 근처에 마땅한 국악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소개받은 종로의 한 국악사로 가기로 했다. 건너 건너 아는 집이니 잘해주겠지 싶어 먼 거리인데도 굳이 갔다. 급행버스 시간에 맞춰 종로로 가는 빨간 버스를 탔는데 웬걸. 버스에 사람이 또 왜 이렇게 많은가. 가야금도 옆자리에 앉혀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야금은 무슨. 나 앉을자리도 운 좋아 난 것.


결국 목에 칼 찬 죄수처럼 내 앉은키 만한 가야금을 내 머리통 앞, 두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갔다. 죄수는 칼에 기대기라도 하지. 내가 찬 칼은 버스가 요동치면 어디 부딪치기라도 할까 봐 살포시 끌어안고 가느라 곤욕이었다.


하필이면 버스는 또 직사광선 내리쬐는 방향으로 탔다.

땀은 뻘뻘 나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흡사 머리 푼 죄수의 몽타주로 칼을 차고.. 아니 가야금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도착한 국악사에서는 조율을 직접 하지 않고 공장으로 보낸다며 맡기고 가라고 한다.


_ 아니 선생님 전화로는 그런 말씀이 없으셨는데.. 아 그래서 가격이 그렇게 싼가.. 근데 왜 싸지?

쎄한 느낌은 조상님들이 어서 당장 도망치라고 형광봉 흔들어주는 거랬는데, 내가 조상님을 덜 믿었는지 조상님 형광봉에 밧데리가 다됐는지, 아니면 내가 머리 푼 죄수여서 그랬는지(?) 나는 쎄한 느낌을 뒤로 하고 가야금을 쏠랑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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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이면 된다고 했지만 연락이 없기에 더 기다렸는데 이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다. 음? 전화를 했더니


"아이고~ 내가 그걸 깜빡했네. 미안해요 미안해. 내가 오늘 바로 공장에 보낼게~"


네? 사장님? 잊어버렸다고요? 네에?? 네에에에?????

거래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정말 잊어버릴 수도 있지. 그러나 그걸 대강 넘어가려고 하는 말투에 불쾌감이 치솟으며 거기다 더해 예민한 악기를 그렇게 무신경한 사람의 더 오래 맡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마에 손이 절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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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질이 거기에 있다.

내 야금이에게 화풀이라도 할까 싶은 쫄보 마음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단전에 힘을 넣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르늬끄아요 스증늼... 으어즥도.. 즈에.. 으악긔를... 조유를 으안흐아싀엇따그여....."

(그러니까요 사장님... 아직도.. 저의.. 악기를... 조율을 안 하셨다고요...)


"아이고 미안하게 됐어요. 내가 그, 다음 주까지 해놓을게요."


"그르그 즈에그아 드아음주브트어 드어달그안 한극으에 으업어요 스아즈앙늼..."

(그리고 제가 다음 주부터 두 달 동안 한국에 없어요 사장님...)

_ 어금니 파사삭


나는 다시 한번 단전에 힘을 주어 분노를 붙잡고 나의 출국 일정을 읊었다.

결국 퀵으로 부쳐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나는 허공에 포효했다. 으따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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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다음날, 혈육으로부터 본가에 나의 야금이가 잘 도착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고

두 달 후, 한국으로 돌아와 가야금을 확인하는데...


안족(줄을 얹어놓는 기러기발 모양의 부속품)에 잔뜩 스크래치가 나있고, 그 사이 또 줄이 끊어져 있다.

와... 진짜 와다 와.

정말 같은 국악사에 맡기고 싶지 않았지만 배상은 받아야겠다 싶어 한번 더 보내서 안족을 새 것으로 바꾸고 줄도 다시 바꾸었다. 그러나... 줄은 또 몇 개월 가지 않아 끊어졌다... 인류애 파사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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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게도 아니 무척 그럼직하게도, 줄이 끊어진 뒤 가야금을 타지 않았다.

하던 공부도 있었거니와 일을 다시 찾아 시작하고 적응하느라 책상 옆에서 말이 없는 가야금을 다시 데리고 어디론가 왔다 갔다 할 기력은커녕 믿음직한 국악사를 다시 찾아볼 기세조차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끊어진 채로 둔 지가 얼마나 됐지? 음... 벌써 2년이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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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쏜살같다'고들 한다.

언젠가 저 말이 정말로 쏜 화살처럼 가슴에 박히던 날이 있었다.

'아! 세월이 정말 쏘아 날아가는 화살 같네..'

누가 처음 쓴 말일까. 쏜 화살에 어디 한구석 스쳐 번쩍 정신이 들었을쯤 했을 법한 말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문득 식겁해서 꺼낸 말이 아닐까. "뭣이? 00년이나 지났다고??" 하며.


아무도 나에게 딱히 요청하진 않겠지만 세월에 대해 말해보라하면

'세월이 끊어진 가야금 줄 날아가는 것 같다'....라고 말할 것이다. (신선도 빵점, 창의성 빵점.)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이며, 튕겨나가는 줄에 맞으면 많이 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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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많았다. 가야금도 조그만 부스러기 꿈 중 하나였다.

무수히 많았던 꿈들 중 내 손에 잡힌 것이 무엇인가 혹은 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다.

지나간 꿈들을 손으로 꼽았다 펼쳤다 한다. 튕겨나간 줄에 맞은 손등을 비비는 기분이 된다. 쓰라려 시무룩해진다.


'줄이 끊어지면 많이 귀찮고 아프지!'

'응. 맞어.'

'그치만 다시 이을 수도 있지!'

'... 그래?'

'그럼!'


누구신진 모르겠는데 누가 속에서 외친다.

그래! 그렇게 외쳐줘서 고맙다!


그치만 취미 가야그머의 신분으로는 20만 원짜리 조율은 도저히 못하겠다.

조금만 더 내 신분에 맞는 곳으로 알아볼게. 어서 곰방 뚱땅거릴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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