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그림이 아니어도 좋다._ 전동 지우개

by 릴리슈슈


"야, 너 덜덜덜덜 거리면서 자기가 막 지워주는 지우개 알아?"

"음?"

"여기 와서 이거 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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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그림에 심취하여 하루에 스케치분 댓 장도 더 그려대던 엄마.

1, 2주에 한 번씩 배우던 그림 수업을 무척 좋아했다. 다음 시간에 선생님께 그림 자랑할 생각을 하며 매일 그림을 폭발적으로 쏟아내던 시절이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엄마는 그림도 열심히 했다.


나이 들어 무언가를 새로 배우는 모든 어른이들이 가진 가장 큰 애로사항은 높아진 눈을 손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대단한 것들이 너무 많아, 많이 대단해야 세상에 자주 비추이게 되는데. 어른이들은 그 자주 내비치는 대단한 것들로 눈이 높아져 자신이 만들어내는 비뚤빼뚤함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내 얘기다.


엄마도 매번 좌절했다.

선긋기 연습을 스케치북에 빼곡히 하면서 선이 끝까지 직선으로 바르게 그려지지 않아 좌절했고

사과를 그리면서 명암을 채우는 선의 굵기가 균일하지 못해 좌절했고

인물을 그리면서 눈과 코의 비율이 맞지 않아 번번이 좌절했다. 아무튼 늘 좌절했다.


근데

좌절하면서 그렸다. 당신 스스로가 와 이거 진짜 못 봐주겠다 하면서도 그렸다.

수영장 앞에 핀 이름 모를 꽃들, 인상파 전시회 때 사온 고흐 엽서 속 그림, 아침 9시의 수영장 강습 풍경과 물속을 자유로이 누비는 자신을 그렸다. 어느 일요일 아침엔 시끌벅적한 소리에 늦잠을 깼다. 거실로 나온 나는 엄마의 위풍당당한 표정과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스케치북 안에는 엄마의 딸과 아들이 그려져 있었다. 기존의 질서를 뒤틀어 미술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 같은 비율의 초상화였다. 맞다. 지금 엄마 놀리는 거..

"어머니, 제가 원래 실물이 좀 나은 편이지요.. 그치만 어머니의 개성적 화풍은 온전히 느껴집니다"

그렇게 그림을 그려제끼시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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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보여준 영상에서는 정말 지우개가 덜덜 거리면서 움직이며 연필선을 지워주고 있었다.

"지우개질이 힘들어서, 이거 있으면 어떨까 싶어."


뭘 사달라고 하지 않는 여사님이 딸에게 뭔가 사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서 사야 할지 몰라서이다.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사님이 뭘 얘기하면 바로 사드린다.

_ 와, 나 좀 멋진데? 근데 생각해보면 비싼 것이 하나도 없다. 에이.. 김여사가 그러면 그렇지..

어쨌든 전동 지우개가 뭐 별거냐. 당장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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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터칼 모양의 전동 지우개가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건전지를 끼워 전원을 켰다.

"윙윙윙윙윙윙-"

".... 아..."


지우개의 첫 번째 퍼포먼스를 지켜보던 가족들 모두 탄식을 흘렸다. 누가 봐도 이건 좀..

1. 지우개가 지우는 면적이 생각보다 작고

2. 지우는 힘이 생각보다 생각보다 약하고

3.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는 것이 나의 분석이라면, 물건을 오더 하신 김여사의 총평은

"이까 어느 천년에 다 지우나. 참말로."

(= 이렇게 느리고 약해서 내가 원하는 면적을 언제 다 지울 수 있겠는가. 정말로.)였다.


전동 지우개는 두 번째 퍼포먼스를 선보이지 못한 채로 그대로 필기구함으로 유배되었다.

"니가 사줬는데 야, 미안하다"

"아유, 써봐야지 알지.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괜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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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생겨 미술수업을 멈추게 되었다. 하여 어머니의 그림의 계절은 지금 잠시 동면기다.

전동 지우개 때문은 아닌데 뭔가 찝찌부리한 기분이 있다. 좀 더 슈퍼멋진비싼 지우개를 사드렸으면 계속 그리셨을까. 아님 내가 좀 더 챙겨드렸으면, 엄마가 조금 더 건강했으면,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아니면..


지금은 어머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운동의 계절을 즐거이 보내고 계시지만,

운동의 계절 사이사이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다시 자리 잡았으면 하는 것이 내 욕심이다.

당신이 원하던 모양을 향해 아직은 더디고 무딘 손을 쉼 없이 연습시키며 원하던 모양으로 조금씩 다가가던, 그 느린 발걸음을 보고 싶다. 온전히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으로, 못난 남편과 아직도 어리기만 한 자식들의 앞뒤 걱정 없이 그저 당신의 기쁨과 성장을 향해서만, 원하는 만큼씩만 천천히 걸어가셨으면 좋겠다.

그러니 사실 그것은 그림이 아니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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