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 신어, 양말. 생은 꽤 길어.
1.
"간장이 없네?"
"엄마, 내가 갔다 올게!"
방에서 뒹굴거리다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슈퍼는 금방이다. 뛰어가면 3분? 아니다. 지하에 있으니까 5분쯤이겠다. 얼른 다녀오면 잡채의 간을 놓치는 일은 없겠어. 그래도 집에서 입고 있던 옷만 입고 그대로 나가긴 좀 뭣해서 겉옷을 걸쳤다. 뛰어야 되니까 슬리퍼는 말고 운동화.
---------------------------------------------------------------호다다다다다닥
'삑' "2450원입니다."
"요기요"
호다다다다다다다닥-------------------------------------------------------------
"엄마 엄마! 간장 간장!"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엄마가 간장 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를 빽 지른다.
"너!! 또 반바지 입고 나갔어??"
"왜? 나 하나도 안 추운데?"
초등학교 6학년의 1월. 소한小寒 께.
2.
"선생님, 저희 반 숙제 가지러 왔는데요."
"응, 여기 이거랑.. 또 이거.. 어머 얘! 너!"
"네?"
"너 지금 맨다리야??"
"네."
"안 추워? 왜? 스타킹이 없었어?"
"안 춥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요."
겨울방학을 앞둔 고등학교 1학년.
3.
"이번에 양말 좀 살 건데 필요한 사람?"
"양말이 없어?"
"아니 있긴 한데.. 발목이 시려서.."
"왜? 너 목 달린 양말 있잖아."
"자전거 타면 바지단이 올라가잖아? 그럼 그 목 위로 바람이 막 들이쳐. 추워. 더 긴 거, 더 긴 거.."
201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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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덮을 기세의 기다란 목양말을 인터넷에서 겨우 찾아냈다.
어릴 때도 신기 싫어하던 판탈롱 양말을 21세기에 이렇게 애타게 찾는다.
도대체 사람들은 이렇게 짧은 양말로 어떻게 겨울을 나는지..
택배가 도착하고, 하얗고 기다란 양말이 왔다.
무릎뼈를 바짝 추월하는 길이감과, 무릎뼈 아래를 단단히 결박하고 있는 고무줄의 쫀쫀한 탄성에 흡족하였으나,
도저히 겨울 양말이라고 말할 수 없는 보통의 두께감에 실망하여, 양말을 두 켤레 신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다 그냥 운동하고 밥 잘 먹고 잠이나 일찍 자라는 어머니의 금언金言에 경탄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우리 엄마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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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자.. 목.. 목이 중요하댔어.. 발목, 손목, 목, 무릎, 어깨.. 뭐 이런 부분 말이야.. 다치기도 쉽고 바람도 잘 든댔어. 그러면은 보자.. 발목은 양말을 이렇게 신어서 좀 단디 보호를 하고..'
어깨너머로 들은 '목'이며 혈자리, 경락 같은 것들을 짚어보다 보니 내 참 이런 날도 있구나 싶다.
'겨울용 스타킹은 무슨.. 스타킹이 왜 필요해?' 하는 표정으로 맨다리에 교복 치마를 입고 다녔는데 이제는 상상조차 안된다. 바로 죽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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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걱정 다 쓸어 담은 표정으로 "뭐 다 죽고 헤어지고 없어지고 그런 거 아니겠어. 영원한 게 어딨겠어."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던 중고등 시절이었다. 하지만 스타킹 없는 겨울은 영원할 줄 알았지.
그처럼 지금의 나도 풍성한 머리칼을, 곧은 척추를, 시리지 않은 이빨들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삶은 덧신 양말처럼 짧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목양말처럼 지긋하게 길다.
늘 뽀얗고 탱탱하지도 못하다. 색은 누르스름해진다. 종아리를 한껏 조여 붙잡고 무릎 너머의 세상을 호시탐탐 노리는 고무줄도 점점 슬금슬금 늘어나 어물어물 발목을 향해 흘러내린다.
_ 아, 그렇게 목양말이 다시 발목양말이 될 때가 되면, 그땐 정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삶이 덧신 양말처럼 짧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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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을 모르니 오늘의 자리가 발목께 인지, 종아리 언저리인지 어쩐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저
목양말 같을 수도 있는 긴 생을 위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근손실을 방지할 것을 다짐,
덧신 양말 같을 수도 있는 짧은 생을 위해선, 오늘 더 웃기로 결심.
_ 그래서 오늘 엄마랑 낄낄거리며 청도 반시를 노나 먹음.
그렇게 내 양말에다 귀여운 추억을 수놓기로 한다.
마음이 시릴 때면 추억을 꺼내 신을 수 있도록, 데운 마음으로 조금 더 멀리까지 자전거를 밟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