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더 자주 더 함께

땅콩버터 알갱이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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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괜찮아?"

"알갱이 들어있는 거지?"

"응"

"그래, 인젠 괜찮아."


땅콩버터를 사러 갔다.

땅콩버터는 두 가지로 나뉜다. 땅콩 알갱이가 들어 있는 것과 들어있지 않은 것. 예로부터 나는 '노 알갱이' 파였지만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땅콩버터 알갱이' 파였다. 때문에 땅콩버터를 살 때마다 나 혼자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다수결의 대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냥 가족 내에서 제일 쪼랩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 미묘한 신경전이 아니라 언제 한번 노 알갱이 땅콩버터를 먹어볼까 하며 눈치나 보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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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내가 외로운 노 알갱이파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수가 가진 권력에 기대어 알갱이가 든 땅콩버터를 늘 가져오는 혈육이 몹시 얄밉기 짝이 없어 일부러 노 알갱이의 구매를 우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입맛도 변하기 마련인지 언제부터인가 오독오독 알갱이가 씹히는 것도 꽤 괜찮다 싶어 졌고 순순히 알갱이 땅콩버터 정권의 장기집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 뭐야. 그러고 보니 오늘도 혈육은 알갱이 땅콩버터를 가져와놓고는 모르는 척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봤네? 뭐야 되게 얄밉네?


그렇지만 땅콩버터를 바른 토스트 위에 내가 좋아하는 얇게 저민 사과를 얹어준 것도 혈육이니 그 정도 얄미움은 땅콩 알갱이와 함께 와작와작 씹어 삼킨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맛있는 거 해주는 사람이 킹왕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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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고 취향은 변하기도 한다. 취향을 가지고 우기며 싸우던 시간들도 이렇게 멀어져 가는가 보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맛있는 걸 해주는 사람의 귀함을 알고, 또 맛있는 걸 사 오고, 또 같이 먹고. 그런 시간들의 소중함은 변함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더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더 많이 더 자주 함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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