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람의 평온함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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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살 일이 있어 도매시장에서 꽃을 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꽃다발을 풀지 못한 채로 밤까지 두었다. 김여사가 나 대신 꽃다발을 잘 풀어 정리해주었다. 아직도 제때 제때 뭘 하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애 인갑다 싶어, 멋적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김여사와 나는 밤마다 야채유동식을 먹는다. 주로 김여사가 배달해주는데, 오늘은 멋적고 고마워서 내가 김여사 방으로 배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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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을 갔더니 김여사가 핸드폰 충전기가 없어졌다는 민원을 넣었다. 오빠 방에 있을 것 같아 오빠 방으로 갔다. 아직 늦지 않은 시간인데 오빠는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티비는 외부입력 상태로, 반쯤 켜진 채였다. 오빠의 몸을 뒤적여 팔꿈치와 이불 사이에 낀 리모컨을 꺼냈다. 티비를 끄고, 김여사의 핸드폰 충전기를 찾고, 마지막으로 오빠의 몸이 지나치게 찌그러져 있진 않은지 살피고,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아 주었다.


핸드폰 충전기를 김여사 발치의 멀티콘센트에 꽂았다. 이부자리에 앉아 잘 준비를 하고 있는 김여사에게 취침인사를 건네고, 문을 닫아 주었다.


아버지 신선생님은 어쩌고 주무시는지 들여다보았다. 과연 초저녁잠의 대명사답게 한밤중이셨다. 아버지의 다리는 기역자 모양을 하고 이불을 끼고 있었다. 종아리가 어둠 사이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불을 다시 덮어 드리려다, 잠옷이 벌써 시원한 여름 반바지길래 그만 두었다. 쌔액쌔액 숨쉬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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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으로 돌아오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의 안위를 살피는 일이 어느샌가 나의 몫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티비와 전등을 끄는 이 작은 의식들은 가족들의 밤을 비로소 밤답게 고요히 만들어 주었다. 고요함 속에서, 나의 몸 가운데에 저 세사람의 평온함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의 평온함이 나의 평온함을 유지시켜주는 무게추라는 것을 알았다. 묵지근한 그 평온의 무게를 주의깊게 느껴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 더 잘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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