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떠나 있는 시간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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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할 일이 있었다.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백수는 꼭 이런 날에 컨디션이 너덜너덜하다. 이거슨 놀고먹겠다는 강렬한 내적 의지의 강력한 외적 표현임이 분명하다. '이건 좀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별 수 없으니, 몸을 달래 가며 쉬엄쉬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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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사진을 촬영해야 하는 일이다. 간이 스튜디오를 만들고, 종류별로 꽃을 정리하고, 오아시스를 자르고, 집 안의 스탠드를 모았다. 조명 사용 경험은 미미하지만, 인물사진이 아니니 그럭저럭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래저래 준비했다.


바스라질 것 같은 몸뚱이와는 달리 촬영은 무척 재미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촬영이었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했다. 문제는 시간 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었다. 딱 2시간이 지나면 집중력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눈이 뽑힐 것 같은 통증이 나타났다.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딱히 방법이 없어 따가운 눈만 하염없이 끔뻑거렸다. '이럴 땐 먹어야지.' 하고 식빵을 반 쪽 구웠다. 온전한 한 장을 굽지 않은 것은 다이어터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그런데 눈이 아프면 식빵을 먹는 건가? 10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의문이 든다. '이래서 다이어트가 지지부진한 것인가' 라는 깨달음도 지금 왔다. 느리게 걷는 아이.. 후..


'2시간 집중 노동 후 기절'의 사이클을 세 번 반복하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참, 고백할 것이 있는데 아까 식빵 반 쪽 먹고 3시간 뒤에 식빵 한 장을 더 먹었다. 김여사가 구워준다기에, 아니 게다가 김여사가 우유를 사 가지고 오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절레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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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그래서 저녁 시간이 되었다. 김여사는 피곤하다더니 월남쌈 재료를 사 왔다. 월남쌈을 먹는 날은 늘 내가 준비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김여사가 아까 나보고 고생이 많다며, "우리 딸 힘든데 맛있는 거 해줘야지"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네. 왜 사온게 월남쌈 재료지..


하여튼 그래서 나는 눈을 계속 껌뻑거린 채로 월남쌈을 준비했다. 김여사도 피곤하고 오빠도 목감기 중이니 제일 젊고 백수인 내가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기도 하다. 무척이나 피곤하여 월남쌈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눈도 뜨고, 살아도 남아야 하니 겨우겨우 먹긴 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후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음? 겨우 먹었는데, 엄청 많이 먹었다는 게 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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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치우고 간이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고 나니 밤 10시다. 시간은 늦고 몸도 피곤한데, 하루를 돌아보니 일하고 밥 먹은 것이 전부다. 자기계발은커녕 덕질도 못했다. 와 나. 그런데 이것 참 익숙한 기분이다. 뭐지? 아 그래! 직장 다닐 때 이랬었지! 하하하하!


갑자기 다시 직장인이 된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하다. '곧 다시 직장인이 되겠지?' 생각하니 식은땀이 나는 듯하다. 땀을 삐질거리는 내 등 뒤로 윤종신의 <오르막길> 이 흐른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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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곧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밥벌이는 소중하니까요. 하지만 잠시라도 좋으니, 하루 중 밥벌이를 떠나 있는 시간이 내게는 필요하다. 지난 직장생활을 통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다.


예쁘고 좋은 것을 보며 킬킬대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답지 않은 글과 그림을 긁적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1절만 연주하는데도 한 곡 전부를 연주하는 것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기타를 뚱땅거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좋아할 수 있는지, 뭘 잘하는지, 뭘 잘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나랑 친해질 수도 없다. 나에 관한 바보가 된다. 외로워진다. 외로워진다. 나를 가장 많이 이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바보가 되니, 외로워지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내일 당장 일을 시작하더라도, 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기억해두고 싶다. 늘 폭풍처럼 업무를 해치우는데 급급했던 지난날도 잘 기억해두고 싶다. 결국 그 폭풍이 나의 건강과 체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소소한 취향까지도 모조리 날려버렸던 것 역시 잘 기억해두고 싶다. 글과 그림과 기타의 즐거움을 알 수 있었던 백수의 시간 또한 잘 기억해두고 싶다. 잘 기억함으로써 반복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균형 있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돈 많은 백수가 되기를 소망한....




소망과는 다른 정서지만 문득 떠오른 노래.

퇴근 후 밤 열 시엔 역시 유리 같은 유희열의 목소리가 그저 그만.


TOY, <혼자 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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