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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넌큘러스, 작약, 튤립, 카라, 몬스테라, 기타 바나나잎 같은 잎사귀를 잔뜩 사서 잔뜩 찍었다.
일주일의 작업이 끝나자 초반에 샀던 꽃은 거의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후반에 산 꽃은 만개의 정점에 다다라 있어 지금 아주 호화스런 모양이다.
촬영을 모두 끝낸 뒤 꽃을 바라보니 강렬한 조명에 나와 같이 눈뽕을 맞은 꽃들에게 동지애가 느껴진다. 아니지, 내가 일방적으로 혹사시킨 것이니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잠자리 날개 같은 고운 잎들이 그 열기를 어찌 견뎠을까. 미안한 마음에 괜히 더 기특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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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무척 좋아하지만, 지난 일주일간은 꽃이 지긋지긋했다.
시간과 체력에 쫓겨 찍느라, 꽃은 생굴처럼 그저 빨리 해치워야 할 생물일 뿐이었다. 사 오자마자 서둘러 손질해서 바로 먹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금방 상해버리고 마는 생굴 같은 꽃들이여..
그래서 꽃을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였다. '아 지겨워..'
그런데 촬영을 다 마친 뒤, 간이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돌아서자마자 꽃은 다시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와.. 어쩜 이렇게 전환이 빠르냐. 이런 게 인간의 마음이구만..' 하며 꽃을 향해 다가갔다.
너무 피었다고 구박했던 라넌큘러스, 너무 안 피었다고 구박한 카라, 너무 크다고, 너무 작다고, 너무 목이 굽었다고, 너무 목이 꼿꼿하다고 구박했던 모든 꽃들이 촬영이 끝나자 같은 이유로 예뻤다.
'얘는 이렇게 활짝이 피었네', '얘는 아직 봉오리니 오래도록 볼 수 있겠네', '어쩜 이렇게 애기 머리통만큼 꽃송이가 클까', '얘는 앞으로 굽어 있어서 더 잘 보인다'..
꽃들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바꾸는 나를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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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마음먹기 나름' 이라는 명제를 이렇게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로 느낀다.
지나온 많은 사람이나 일, 상황들도 저 꽃 같았던 건 아닐까. 그냥 그 사람이고 그 일이고 그 상황이었던 건데.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 형편에 맞춰 싫으니 좋으니 했던 건 아닐까. 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말 나더러 사이코패스 내지는 또라이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거..
'어? 그렇다면 내게 사이코패스와 또라이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겠네. 나 같은 그냥 그런 사람이었겠네..'
아.... 야.... 이거 맞는 말 같긴 한데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갑자기 다시 화가 날라 한다. 역지사지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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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되기' 가 삶의 목표였는데, 참으로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냥 '사람 되기' 로 목표를 수정한다. 사람이 되어보자. '꽃을 보며 사람이 되어보자고 결심하다니 이것 좀 아름답지 않은가!' 생각하다, 정말 이래서 언제 사람이 되려나 싶어 약간 걱정이 됐다. 꽃도 시들고 사람도 시든다. 시들기 전에 좀 사람 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