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거기 있그든요

세계 기분널뛰기 선수권 대회 챔피언에게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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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내 인생 망했어' 하며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당장이라도 포르쉐 카이엔을 현금 일시불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다. 오늘은 내 기준 좋은 날씨여서, 독한 아인슈페너를 마셔서 기분이 좋은건데, 어제는 왜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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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박'이 실시간 검색어로 등장한 오늘은, 호랑이 시집간 정도가 아니라 장가도 가고 여우도 막 시집 장가를 왔다가 막 갔다가 하고 막 내가 마 느그 서장님이랑 마 사우나도 가고... 아무튼 그런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주룩비가 내리는 날씨를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이를 데 없는 최고의 날이었다. 게다가 석촌호수와 방이동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롯데월드몰 5층 서점 카페의 거대한 통유리를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으니. 아아.


하지만 역시 지금의 하이퍼모드는 별생각 없이 주문한 '아인슈페너' 의 공이 크다.

이유를 분석하고 있는 이제와 생각해보는 건데, 저 아인슈페너에는 아무래도 에스프레소 샷이 두 개 들어있었던 것 같다. 보통은 세 시간 마다 느끼는 배고픔을, 저걸 마시고 나서는 여섯 시간째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강력한 각성 덕에,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래서 다이어트에 막 성공해서 48킬로가 될 것 같고 갑자기 인생이 막 즐겁고 만사가 막 형통해서 카이엔 키가 내 손에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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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지금은 그렇다 치고, 어제는 왜 그랬지?'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제는 망했다가 오늘은 인생요들레히요들레이 이러는걸 보니, 세상 못 믿겠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기분'이다. 뭐야 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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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변하니 의심이 든다. 기분이란 것은 실체가 있는 걸까? 너무 바뀌는데. 날씨처럼. 믿을 수가 없네.

예전에도 가졌던 의문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을 오랫동안 찾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일기 너머의 하늘 같은 것을. 그리고 운 좋게 그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하늘을 잘 닦아 관리하지 않았더니 다시 먼지도 끼고, 먼지 냄새를 맡고 먹구름도 몰려오고, 먹구름들이 거기가 제 집인 줄 알고, 지네 집에 안 가고, 그럼 나는 또 내 하늘이란 건 원래 어두운 거라고 생각하고.. 그랬다. 내가 지은 죄 중 가장 큰 것은 단연 내 하늘에게 진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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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변하는 것이 눈에 띄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라는 줄 알고 좀 가만히 있어보자.

먹구름이 가득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먹구름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하늘이 있다는 걸 지긋한 눈으로 쳐다보는 법을 익히도록 하자. 할 수 있겠나 일희일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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