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주기

식물집사의 돌봄노동에 관한, 무자비하게 긴 글

by 소란화

언제부터였을까. 풀에 물주는 일은 식구들 중 내 몫이 되었다. 지금 푸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풀에 물을 줄 때 기쁜 마음으로 준다. 다만 풀에 물주는 일이 ‘나답지’ 않은 일이어서 그렇다. ‘나다운’ 것? 그게

무엇일까?


나는 시간 운용이 자유로운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전 중에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시간이 있다. 원래는 자유롭지 않았다. 전일제 학생이어서 늘 집 밖에 있었고 학업을 마친 후에는 오전 6시에 나가 밤 10시에 귀가하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 20대의 대부분, 나는 집 밖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물론 절반은 내 책임이다. 나는 시간을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밤까지 시달리며 사는 삶.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처럼 호기롭게 얻어낸 시간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집 안에 가두어놓았다. 시간 운용이 자유로운 사람은 자동으로 ‘집안일 하는 사람’이 된다는 걸 미처 몰랐다. 풀을 쳐다보며 물을 뿌리는 일도 중요한 집안일 가운데 하나다. 나는 꼿꼿한 자세로 싱크대 앞에 서서, 비장한 표정으로 물뿌리개에 물을 받는다.


뭔가를 돌본다는 건 생각보다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그건 나답지 않다. 참고, 살피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 나는 이제껏 누군가의 돌봄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런 돌봄의 현실을 외면했었다. 집에 있는 풀들은 야생의 풀들처럼 비바람과 햇살을 마음껏 맞을 수 없기에 철저히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만큼 일조량을 채워주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하고,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량의 물을 주어야 한다. 나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손길 없이는 이만큼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손길들이 없는 척 굴었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내가 쓰고 버린 것들을 치워주는 인내심의 손길들. 돌봄의 그림자들.


물이 가득 찬 물뿌리개는 제법 무겁다. 투명하고 냄새도 없는 심심한 액체. 이것 하나로 사시사철을 건강하게 살아있을 수 있다니, 새삼 식물의 생명력에 혼자 감탄해본다. 물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미생물과 벌레, 화학물질과 햇볕이 어우러져 식물의 생명 유지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비로운 건, 동물과 달리 풀은 구태여 다른 존재를 죽여서까지 에너지를 섭취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물을 마시는 풀에 대고 귀를 가만히 기울여보면 쪼르륵, 하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도살장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닭이나 돼지 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 인간이 다른 존재의 고통 없이도 물과 햇볕만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면, 세상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까? 식물은 선량하고 동물은 악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주는 일은 살짝 귀찮을 때도 있지만, ‘나’라는 동물을 돌보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 희생되는 생명의 무게와 비교해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닭과 돼지를 먹어 치웠는가. 물뿌리개를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얘들아, 밥 내려간다!


풀들은 대체로 조용하다. ‘대체로’라는 말은 때론 소음도 낸다는 뜻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물을 줄 때 내는 소리만 해도 그렇다. 풀마다 물을 삼키는 소리가 다르다. 꼬르륵, 꾸룩꾸룩, 사라라락, 찌르륵, 뽀글뽀글. 성장 속도가 다르고 종이 다르니 당연한 결론이다. 우리 집에는 알로에, 금전수, 수국, 선인장, 스투키, 스킨, 몬스텔라, 크루시아, 필레아페페, 산세베리아가 산다. 간단하게는 잎의 생김새에 따라 세 종류로 분류한다. 뾰족한 아이, 동글동글한 아이, 제멋대로인 아이. 풀떼기에 ‘아이’라니, 이거야말로 정말 나답지 않은 남우세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식물에 두어 달만 물을 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식물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봄의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더없이 소중해진다. 돌보는 행위가 그렇게 만든다.


물만 주면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물을 머금은 식물이 흙속 깊숙이 박힌 뿌리와 그 옆에서 잔뜩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는 이름 모를 벌레들에게 부지런히 영양을 공급하는 동안, ‘집사’는 소위 ‘오줌’ 받아낼 준비를 한다. 말이 오줌이지 화분 아래로 흘러나오는 구정물 같은 것이다. 이게 왜 오줌으로 불리냐면 생각보다 냄새가 심하다. 보통은 퀴퀴한 정도로 끝나지만 가끔 중금속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기도 해서, 마트에서 사온 흙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지 제법 걱정될 때도 있다. 이 오줌에는 흙 속에서 죽어버린 벌레 사체들도 잔뜩 섞여 있다. 작은 날벌레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를 만큼 크고 희한하게 생긴 개체도 종종 발견된다. 처음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변기에 부어버렸지만, 이제는 오줌을 제거한 후 물받이에 낀 때까지 곳곳을 말끔히 씻어내야만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 새 기저귀를 채워주는 기분이라고 할까.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화분 물받이를 제대로 청소해주지 않은 풀에서는 묘한 냄새가 나고 잎도 쉽게 노래진다. 기분 탓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청결한 환경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이 사람 눈에 한갓 미물이라 할지라도.


나는 ‘더러운 것’을 피하는 사람이었다. 더러운 것은 나답지 못한 것이었다. 실은 나 자신이 종종 더러워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동물인 나는 더우면 땀을 흘리고 배가 아프면 배설을 한다. 화가 나면 나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버럭 분을 터트리고 때론 세상을 욕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더러움을 포용할 수 없었기에 그런 더러움을 제대로 다루고 돌보는 일도 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누군가가 나를 돌보게 만들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조금 더 커서는 선생님이, 20대 직장인일 때는 사수와 동료들이, 주말에는 친구들이, 내 곁에서 주야장천으로 나의 더러움을 살뜰히 치워주고 보살펴주었다. 나는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그것들이 항상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점을 직면하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외면하고 부정하기만 했다. 나는 스스로를 돌보는데도 미숙했고,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돌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내가 지금 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준다. 가장 오래도록 함께 한 아이는 벌써 6년이 훌쩍 넘었다. 줄기와 잎이 어딘지 모르게 늙고 빛바랜 사진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익숙하고도 정겨운 냄새를 풍긴다. 우리 집 냄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식물은 함께 사는 사람과 닮아간다. 외모가 닮는다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풀들은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신의 감각을 동기화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저명한 과학저널에 이미 실린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실제로 체험한 집사들 중 하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집 풀들의 물 먹는 스케줄은 철저히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 풀마다 서로 다른 급수주기를 가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하루 종일 풀만 쳐다보고(?) 있을 순 없기에 나는 특정한 하루를 지정해서 일괄 급수하는 편이다.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내 편의에 맞춘다는 생각 때문에 양심에 찔려 괴로웠다. 하지만 얼마 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주는 날이 가까워져 갈 때 쯤, 거의 모든 풀들의 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바싹 말라 있곤 했다. 밥 먹을 준비가 다 됐다는 듯이 말이다. 식물이 꼼짝도 않고 수동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완전히 틀렸다. 풀들은 돌봐주는 이의 ‘눈치’를 살핀다. 자연 속에서 해님과 달님, 흙님과 바람님, 비님의 눈치를 보며 살던 것처럼.


그럼에도 산세베리아는 산세베리아답게, 금전수는 금전수답게 자란다. 물 먹는 날은 같을지 모르지만 풀들마다 성격은 제각각이다. 어떤 아이는 새로운 뿌리에서 자꾸만 새로운 잎이 나오고, 또 다른 아이는 한 번 잘라준 가지에서 다시는 새 잎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스투키다운 것이고, 저것이 선인장다운 것이니까. 저마다 자기답게 존재한다. 나답게. 식물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나에게는?


나와는 다른 존재를 살뜰하고 정답게 보살피는 것.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상상하고 그 여린 마음에 공감하는 것. 나다운 것과 거리가 멀다고, 나처럼 이기적이고 스스로의 안위 밖에 챙길 줄 모르는 ‘각자도생’형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돌봄 노동은 뜻밖에 내 기쁨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답다’, ‘나답지 않다’고 가지를 치고 경계를 세웠던 건 순전히 내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헛짓거리가 아니었을까. 애초에 그런 구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느덧 물 내려가는 소리도 멎고, 화분 물받이의 물때도 깨끗이 닦아주었다. 물 먹은 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것이 보인다. 작은 소동이 잠잠해졌다. 풀들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렇게 조용할수록 마음 속 소음은 더 크게 들리곤 한다. 나는 물을 주는 내내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속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풀들은 분명 내 마음속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조언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기다린다. 언제까지고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골똘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본다. 그렇게 그저 곁을 묵묵히 지킨다.

조용한 이는 흔히 무시되곤 한다.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그다지 눈여겨 보려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내성적이다, 은밀하다, 속을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들이 붙는다. 나는 어딜 가나 숨고 싶어 하는 수줍음 많은 성격이었지만 조용하게 지내는 것의 사회적인 불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밝고 명랑하고 다소 수다스러운 성격을 나다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런 애씀조차 못 본 체 했다. 이 학교에서, 조직에서, 모임에서, 식물 같은 인간이 될 순 없어! 조용히 물을 먹고 청초하게 흔들거리는 우리 집 풀들 앞에서, 식물 같은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악을 쓰던 내 과거를 떠올려본다. 잎이 건들린 미모사처럼 손발이 오그라든다. 대체 식물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그런 따위의 한심한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일까.


결국엔 또 이렇게 물주는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깨끗한 심신으로 식물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싶었는데, 오늘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에 둘러싸여 물이 뿌리로 들어가는지 이파리 위로 흘러내리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엉망진창인 나라도 물을 주지 않으면 우리 집 풀들은 시들시들해지다가 언젠간 안타까운 모습으로 수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나다운 게 뭔지 잘 몰라도, 물주는 것이 여전히 나답지 못한 활동이라는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더라도, 나는 우리 집 풀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목을 쭉 빼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을 고요히 지켜봐주는, 이 사랑스러운 존재들의 생명을 책임질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어를 잘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