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아님)
사람들은 영어를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이르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늦게는 팔순이 넘어서까지. 영어를 하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외국인과 소통하고 싶어서. 영어를 잘하면 출세가 빠르니까. 시험을 쳐야 하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버릴 수 없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토록 '오래' 붙들고 있어야 할 만큼 영어가 반드시 필요한 걸까? 어느 정도 배웠으면 좀 '놔주면' 안 되는 건가? 오히려 그렇게 붙들었던 걸 놔버릴 때에야, 비로소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에 관한 지식보다도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 관한 지식이 우선이다. 그런 지식을 모으기 위해서는 영어가 잔뜩 씌인 문법, 회화, 파닉스 책만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우선 번역기를 쓴다. 번역기를 써서라도 채팅방에 들어가 영어를 쓰는 이들과 대화를 한다. 아무 말이나 한다. 어때, 오늘 어때? 뭐 재밌는 일 있어? 넌 어떤 일을 해? 아이들이 있니? 취미가 뭐야? 뉴진스를 좋아한다고? 한국에 사는 건 어떻냐고? 어쩌면 이런 소통을 위해서라도,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보단 정보기기 다루는 능력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무작정 말을 붙였다가 의외의 반응을 마주하게 되면 어쩌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어색함, 무안함, 수치심. 학자들은 이런 불쾌한 감정이 '언어 자아(language ego)'에 대한 위협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한다. 모르는 언어를 마구 사용하다보면 바보가 된 것 같다. 무지, 무식. 어떤 외국인들은 '뭐라는 거야what?'하며 퉁명스레 대꾸한다. 하지만 어떤 외국인들은 '너 재미있네interesting~'하며 더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외국인들과 친해지는 과정에서 위축된 언어 자아를 조금씩 회복한다. 모두가 친절할 순 없다. 그러니 내게 친절한 이들과만 가까워져도 괜찮다.
우리는 엄마 자궁에서 '가나다' 교본을 미리 선행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누워있는 우리들에게 부모님은 부지런히 아무 말이나 붙였다. 다정한 한국어, 화난 한국어, 짜증난 한국어, 기쁜 한국어, 달콤쌉쌀한 한국어로 매초, 매분, 매시간,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단어와 문장을 들려주었다. 책상 앞에 꼼짝없이 앉아 초성이 어떻고 안은 문장이 어떻고를 외워서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한국어를 배웠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숨쉬듯이 한국어를 말하고, 듣고, 쓸 수 있었을까. 그러니 모든 언어는 '사람'에서 시작한다. 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 내가 말을 거는 사람, 그리고 우리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또 대화. 대화 속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교재 속의 만들어진 대본 말고, '진짜' 자기 감정과 생각,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살아있는 말이 펄떡거리는 활어처럼 쏟아진다.
'Gonna grab some coffee for sometime?' 이 말을 원어민 친구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당황스러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영어실력에 있어서는 적어도 한국인 1퍼센트에는 든다고 (근거없이) 자부했던 사람이었다. 무슨 뜻이냐고 되물어보기도 민망해, 대충 알았다고 대답해놓고 이후 꽤 곤란을 겪었다. 그는 내게 커피 한 잔 하자고 제법 진지하게 제안했던 것인데, 그 뜻을 몰랐다가 의도찮게 바람을 맞혀버려 사이가 어색해진 것이다. 데이트 신청 같은 건 아니었고 다만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아 나와 친해지려던 것이었는데, 그렇게 좋은 외국 친구를 만들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셈이었다. 변명을 하나 하자면, 그때까지 'grab'과 'coffee'가 함께 쓰이는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영어를 잘하려면 유학을 가거나 외국인들 속에 파묻혀 살거나 워킹홀리데이라도 하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통해 연결되는 순간, 그곳에는 '관계'가 생겨나고, 그 관계 속에서 마침내 우리는 정말로 영어와 '편해'질 수 있다. 발음이 생각만큼 안 '꼬불텅'거려도 상관 없다. 내가 쓰는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해도 상관 없다. 상대는 나를 안다. 상대는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는 내 말을 알아서 '걸러' 듣는다. 필요하다면 내 말을 교정해준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서 '번역'해 듣는다. 우리 사이에 대화만 통한다면, 그 때부터 영어는 더 이상 '잘'해야 하는 어떤 대단한 미션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잘' 전달해주는, 꽤 괜찮은 '도구'로서만 남게 된다. 사실 그것이 영어의 원래 목적 아니었나.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