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집샀다

(*주의: 어그로 아님. 그 '집'도 아님.)

by 소란화

나, 삼십대 여자. 집샀다. 대출따위 필요도 없었다. 산 김에 저층에선 베이킹도 좀 해보려고 오븐이랑 밀대도 같이 샀다. 사실상 옵션 포함이었다. 이렇게 좋은 집을 왜 지금에서야 샀을까. 발단은 '식완'이었다.


'식완'은 식품완구의 준말. 손톱만큼 작은 모형을 일컫는 말이다. 만화 캐릭터 테마인 것이 대부분이다. 리라쿠마, 스누피, 짱구, 등등. 대학생 때 미친 척하고 리라쿠마 겨울나기 세트를 산 적이 있다. 목도리를 두른 리라쿠마와 노란 소파, 식탁과 티테이블, 러그, 장작난로와 부지깽이, 국이 든 솥, 밥그릇 두어개, 먹다 남은 곰돌이 모양 빵까지 디테일에 진심인 식완이었다. 그냥 그걸로 끝날 줄 알았다. 이런 미친 돈, 다시는 허투루 쓰지 않으리라 다짐한 걸로 다된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때론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정신없는 것이 또 능청맞게 '식완'을 검색하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버렸다. 알고리즘은 나를 식완에서 아동완구로, 아동완구에서 인형의 집으로, 인형의 집에서 마침내 그 유명한 '실바니안 패밀리'로 이끌었다. 나는 (기꺼이) 질질 끌려갔다.


실바니안. 이름도 고급진 (콩지토끼야 미안해) 이 친구들은 사과보다 빨간 지붕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토끼다. 그렇다. 토끼의 해가 찾아왔으니까, 뭐라도 토끼스러운 것(?)을 가져야(?)하지 않겠는가. 벌써 3년이 넘도록 곤도 마리에를 비롯한 각종 미니멀리스트의 콘텐츠를 탐독해 온, 자칭 환경운동(에 관심은 많은)지지자로서 할 짓은 아니지만, 도를 넘은 욕심이 결국 내 비천한(!) 인간성에 힘입어 '바로구매' 버튼을 눌러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나도 '실바니안 빨간 지붕 이층집'을 갖게 되었다는 자초지종.


나같은 어른이 아주 드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년 새에, 장난감 취미를 가진 어른들을 통틀어 '키덜트'라고 부르는 풍조가 자리잡았다. 몇 백에서 몇 천을 넘나드는 아주 비싼 장난감들도 많지만, 솔직히 장난감이라는 게 몇 백원이든 몇 천만원이든 어디까지나 '사치품'인 건 사실이다. 어린이에게는 '갖고 놀며 배운다', 라는 정당한 명목이라도 있지만, 어른에게는 '대체 왜?' 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예쁜 쓰레기', '소확행' 등등 순화된 말을 가져와봐야, 키덜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겐 소용 없는 일이다. 당장 만원이 아쉬운 판국에 나이 먹어 대체 무슨 생각들인건지, 쯧쯧(정당한 우려와 비판인 건 맞지만 '쯧쯧'은 좀 상처다).


그런데 나, 행복하다. 들어가 살 수 있는 집도 아니고 이세권이나 스세권도 아니고 투자가치라곤 요만큼도 없고 심지어 단독주택이라 겨울이면 난방도 신경쓰일텐데(?) 그래도 행복하다. 너무 조그맣고 앙증맞아서 행복하다. 책상 위에, 장식장 위에, 아니면 그냥 바닥에 두고 마음껏 살펴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플라스틱 쪼가리일지언정 섬세하고 사랑스러워서 행복하다. 복잡하지 않아서 행복하다. 이층엔 토끼가 살고, 저층에선 빵이 구워진다. 가짜 오븐과 가짜 에이프런. 가짜 빵과 가짜 트레이. 진짜의 마음으로 살아가도 가짜 같은 결과가 즐비한 세상에서, 비록 가짜이지만 나를 진짜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ps. 아무튼 이 글은 실바니안 패밀리 광고는 아니다. 그래도 마음 약한 사람은 어쩐지 사고 싶어졌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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