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은의 김밥

(네, 바로 그 '문동은')

by 소란화

'더 글로리'. 나도 봤다. 학폭. 끔찍했다. 복수를 향한 한 걸음, 한 걸음. 통쾌하지만 한편으론 쓰라렸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의외의 장면에서 나는 자꾸만 마음이 걸렸다. 바로 문동은의 김밥 먹는 씬.


문동은은 제대로 갖춘 식사를 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기로, 시즌1 내내 단 한 번도 그녀가 식탁에서 누군가와 백반 하나 뚝딱 비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늘 혼자이지만, 먹을 땐 더더욱 혼자다. 어쩌다 순대, 국밥 따위를 놓고 누군가와 겸상을 하더라도, '난 이미 먹고 왔어요'라는 말로 퉁쳐지던지 아니면 어디까지나 복수 이야기의 진행을 위한 안줏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그런 그녀의 주식은 다름 아닌 김밥이다. 동네 분식집에서 말아주는 은박지에 싼 투박한 김밥. 내용물을 알 순 없지만 어쩐지 돈까스 김밥, 새우튀김 김밥처럼 화려한 김밥은 아닐 것 같다. 그냥 기본맛 김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계란, 당근, 오이, 단무지, 시금치, 밥, 그리고 김. 때로 문동은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도 사 먹는다. 심지어 라면도 곁들이지 않고 김밥만 먹는다. 정말 드라이(!)한 식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왜 그녀의 드라이한 식사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한국에서 문동은처럼 식사하는 사람은 제법 많다. 다들 여유가 없어서다. 말 그대로 금전적 여유가 없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간의 여유가 없다. 어디에서 또 다른 어디론가 이동하는 와중에 서서 먹기. 허기나 급히 때우려고 대충 잡히는대로 먹기. 김밥, 샌드위치, 각종 스낵류, 그리고 컵라면. 그것도 마치 부끄러운 일이라도 처리하듯 허겁지겁이다. 한 손엔 휴대전화를 들고, 곁눈질 하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보다 눈으로 쏟아지는 온갖 정보에 신경을 더 바짝 세운다. 물론 문동은은 김밥을 그렇게 허겁지겁 해치우진 않는다. 천천히, 무언가를 되새기듯, 조금쯤은 서늘한 느낌이 들만큼 꼭꼭 야무지게도 씹어 먹는다. 드라마를 다 본 사람이면 짐작하겠지만, 그녀가 계속 김밥을 찾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박연진 일당을 향한 복수심을 북돋아주는 촉매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우리들을 많이 닮아 있다. 복수를 위해서든, 성공을 위해서든, 다음 목적지를 위해서든, 돈을 위해서든, 어찌 됐든 무언가를 '위해' 먹는 것이다.


'네가 먹는 김밥 속 참치는 다름 아닌 죽은 것'이란 말을 들은 후로('두 스승' 글 참조), 나는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먹기 위해서' 먹게 되었다. 다시 말해, 먹는 것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입에 넣든, 고기든 생선이든 과일이든 채소든, 내 입으로 들어간 그 어떤 '죽은 것'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새삼스럽거나 징그럽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먹기 위해 먹기 시작한 후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믿거나 말거나, 음식에 들어있는 일종의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집에서 준비한 요리는 아무리 허섭스럽다해도 그 자체로 어떤 '따스함'이 느껴진다. 한편, 포장이나 배달 요리는 조리한 사람의 기분이 어땠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느낌을 풍긴다. 단순히 맛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넘어, 음식에 담긴 에너지는 그 자체로 내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로우 푸드'와 '패스트 푸드'의 차이를, '집밥'과 '외식'의 차이를, '육류 요리'와 '비건 식단'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글로리' 시즌2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이 복수극이 어떻게 끝나든, 새 시즌에서 제발 단 한 장면이라도 문동은이 누군가와 맛있는 밥을 한그릇 뚝딱 비우는 모습을 보기 원한다. 비록 픽션 속 인물이기는 하나, 문동은, 그녀가 단지 '먹기 위해' 먹는 연습을 한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안전한 사람 앞에서 따뜻한 밥 한 숟갈을 꿀떡 넘기는 경험을 한다면, 가해자에게 복수하려는 바로 그 증오심만큼이나 열렬한 '자기 사랑self love'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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