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 동안 설거지를 많이 했다. 식구들 먹은 그릇, 손님들 드신 그릇, 요리하기 위해 필요한 그릇, 물컵, 커피잔, 반찬통, 냄비, 각종 집기 등등.
즐거웠다. 나는 설거지를 좋아한다. 따뜻한 물에 닿아 녹아내리는 음식물 찌꺼기들, 본연의 새하얀 얼굴로 돌아가는 예쁜 그릇들의 모습, 세제 특유의 미끈거림과 하얀 거품이 더러운 그릇들 위에 펼치는 순간의 마법. 어느 하나 버릴게 없다.
설거지에 집중하고 있으면, 외부의 소음과 철저히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 설령 언성이 조금 높아지는 분위기가 조성되더라도, 설거지하는 부엌만큼은 그런 긴장감에서 철옹성처럼 안전하다. 그 누구도 '감히' 산더미같은 그릇을 씻고있는 자를 건드리진 않으니 말이다.
나는 뭔가를 깨끗이 만든다는 점이 좋아서 설거지가 좋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릇을 씻는 행위가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내가 먹은 것 뿐만 아니라 남이 먹고 남은, 더럽고 지저분해진 그릇들을 닦고 치우는 과정에서 나는 어렸을 적 나를 돌봐왔던 그 모든 손길을 상상하곤 한다. 내가 먹고 남은 것, 내 용변, 토사물,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모두 닦고 씻고 정리해주었던, 그럼에도 내게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을 떠올린다.
처음으로 설거지를 한 건 초등학교 이학년 때였다. 당시 이십대 중반 쯤 되던 사촌 언니 둘이 놀러와 맛있는 것을 해먹은 후였다. 언니들이 설거지하는 걸 보고 문득 나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한 언니가 '너는 너무 어려서 이런 어려운 건 할 수 없다'며 웃어넘겼다. 나는 부아가 나서 한사코 우겼다. 다른 언니가 의자를 가져와 작은 나를 싱크대 곁으로 올려주었다. 신이 나서 물을 틀고 그릇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니가 눈을 세모나게 뜨며 핀잔을 주었다. "설거지는 장난이 아니야."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언니를 따라 고사리손으로 행주에 세재를 담뿍 묻혀 그릇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닦아나갔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른다. 다만 허리가 무지 아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설거지가 장난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깨달았던 날이었다.
이 세상에 '장난'인 일은 없다. 엄마가 하든 할아버지가 하든, 누나가 하든 삼촌이 하든, 그 누가 하든 남을 돌보고 뒤치다꺼리 하는 설거지같은 일은 더더욱 장난이 아니다. 돌봄과 가사가 다 그렇듯, 설은 끝났지만 설거지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내가 즐거워하고, 게다가 '장난'도 아닌 일이니, 어쨌든지 자부심을 가지고 해나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