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는 명절
(주의: 그렇다고 폭주하진 말자)
명절이다. 그러니까, '어떤 어른이 이런 말을 했네 그래서 불쾌했네 싸움이 났네' 하는 말들이 들려오고, 방송에서는 가족 간 불화가 심지어 폭력사건으로 치달은 경우를 보도하기도 하는 바로 그때다. 명절 때만큼 바운더리가 위태로워지는 시기도 없다. 바운더리boundary,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 말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일단 넘었다 하면 서로 얼굴 붉히거나 아니면 한판 붙고야 마는, 제법 아슬아슬한 선.
나는 바운더리가 비록 영어권 용어기는 해도 그 개념만큼은 이 세상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도 '이 사람아 선은 넘지 말게' 따위의 말을 아주 오래전부터 썼으니까. 한때 이 바운더리를 놓고 한동안 붐이 일었다. 바운더리를 지킬 줄 아는 예의바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전자는 젊은 감각, 쿨함, 깔끔함을 대표하는 한편, 후자는 흔히 무개념 꼰대로 비난받곤 했다. 그리고 그 구별은 지금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그러나 나는 생각해본다. 물론 바운더리는 잘 지키면 좋다. 괜히 오지랖 부려 화를 자초하고 타인을 화나게 만들 필요가 있나.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바운더리란 허구의 개념이다. 그런게 있다고 상상하며 서로 예의를 지킨다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건 법이 아니라 상규에 다름 아니다. 절대적인 건 아니란 얘기다.
나는 선 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했다. 나 자신을 상처 잘 받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살 때는 그랬다. 조금만 낌새가 보여도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고 지레 거리를 두고 피해버렸다. 관심과 호기심을 침해와 참견으로 오해하기 일쑤였다. 서툰 표현 뒤에 숨은, 친해지고픈 마음과 연결되고픈 열망은 미처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바운더리가 사람과의 사이에서 반드시 유용하고 유익한 개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주장을 접하게 되었다. 사람사이의 사랑이란 본래 속성상 너무나 거대하고 또 포용적이라서, 바운더리를 강하게 둘러쳐 버린다면 그 사랑의 무한함과 신비로움을 온전히 누릴 수 없을거란 주장이었다. 나는 처음엔 이런 생각이 낯설기만 했다. 선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않나.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바운더리는 결국 '나만 아는' 나의 한계다. 날 모르는 사람들이 내 한계를 알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바운더리를 내세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검열하고 판단한다면, 그 촘촘한 '필터링'을 무사히 통과해 내 곁에 다가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로 얼굴을 보고 온기를 나누고 밥상을 함께하는 명절은 사랑이 오고 가기에 좋은 때이다. 사랑의 거대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풍성한 마음이 명절 내내 모두와 함께 하길 기원해본다.
※ 노파심에 붙이는 추신.
절대 넘어선 안되는 바운더리라는 건 분명 있다. 바로 상대의 상처와 직결되는 이슈들이다. 친한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선 서로의 상처와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알기가 더 쉽다. 그러니 그걸 알고도 부러 넘었다면, 변명의 여지는 없는 셈이다. 그런 선 넘기에는 애초에 사랑 따윈 없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