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말을 아예 안 하는 건지도 모른다)
꼭지 하나:
친구 A. 그와는 평소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편이었다. 어느새 졸업반이 된 우리들의 화두는 단연 '취업'이었다. 여느 때처럼 식당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밥이 나오기 직전까지도 각자의 미래에 관한 열띤 수다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식사가 나왔다. 속도가 빨라 십여분만에 백반 하나를 뚝딱 비운 A는 한동안 나를 기다리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소란화, 우리같은 사람들의 문제가 뭔지 아니?" '우리같은?' 나는 뜨악한 표정이 되어 A의 다음 말만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왜인지 조마조마했다. A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어중간하다는 거야. 공부도, 얼굴도, 재능도, 집안도. 다 완전, 중간이잖아." 아... 그래?
꼭지 둘:
대학원과정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날. 처음 본 얼굴 중 B가 유독 살가웠다. 그와는 어쩐지 깊이 친해질 수 있을거란 근거없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들뜬 마음으로 둘이서 사이좋게 근처 카페로 향했다.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던 중, B는 왜 하필 이 전공을 택했는지 물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대학원 전공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를 털어놓자면 먼 과거까지 거슬러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만난 지 겨우 몇 시간 밖에 안된 낯선 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2년간은 함께 '으쌰으쌰'할 사이다. 기왕지사, 말 못 할 게 뭐 있냐는 안이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다 풀어놓기로 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참을성있게 귀기울이던 B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이구, 저런! 알겠어요." '아이구, 저런?' 나는 B의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천진하게 웃으며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어쨌든 힐링하려고 오신 거네요? 여기에서라도 위로받고 싶으셨나봐요." 오... 그런가?
꼭지 셋:
유학시절, 한국계 미국인 C를 만났다. 그는 무엇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나를 세세히 챙겨주는 살뜰한 친구였다. 그가 자못 편해진 나는 어느 날 대화 중 대뜸 이런 말을 해버렸다. "C, 넌 좋겠다. 여기서는 미국인, 한국에서는 한국인. 정체성이 두 개나 있으니 재미있잖아." C가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둘 사이를 휩싸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내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C가 답했다. "소란화, 앞으로 다른 한국계 미국인에겐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앗... 그렇구나.
'아, 오, 앗', 으로 끝나버린 찝찝한 기억의 단편들. 위 대화들 속에서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하지만,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상한 말을 '내뱉곤' 한다. 그건 순전히 뇌신경 오류일 수도 있고, 깊은 무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고, 단순히 배가 고프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식곤증 때문일 수도(!) 나의 경우를 변명해보자면, C에게 그런 바보같은 말을 한 이유는 단지 친근함을 표시하고 싶어서였다. 너만 나를 늘 이해해주고 챙겨주는데, 이제 나도 좀 그렇게 해보겠다는, 수줍고 서툴지만 분명한 애정의 제스처였다. 의도찮게 스텝이 꼬여버려 제대로 망쳐버렸다는 결론이긴 하지만.
나도 하고 남도 하는 말실수다. 그깟 실수인데 기억이 참 오래도 간다. 상대로 인해 상처받았던 나도,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상대도, 마치 틱톡 화면처럼 쉬지 않고 반복 재생된다. 말이 대체 뭐길래 그런가 싶다. 성가시기만한 이런 기억들이 때론 급브레이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뭐라도 한 마디 할까, 싶으면 유령처럼 스물스물 나타나 어느새 내 입에 가만히 재갈을 물려버린다. 아무 말 하지 마. 그게 훨씬 더 낫다는 거 알잖아?
맞다. 어떤 말은 입밖으로 나가기 전에 잽싸게 붙잡아 비끄러매 두는 것이, 그것을 잘 다루는 최, 최,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