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을 거란 환상 속에 빠져 살 때가 있었다. '답을 쓴 사람은 답을 가진 사람 아니겠는가'하는, 단순 논리에 기초한 생각으로 글뿐 아니라 글 너머의 사람까지 다 알았다고 착각하며 지내던 시기였다. 내가 만일 그때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도 그 천진함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존경받는 연구자였다. 그가 쓴 글은 독보적이었고, 많은 학생이 그에게 사사받기를 원했다. 나 또한 그랬다. 그의 글은 시공을 뛰어넘어 인류와 교감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쉽고, 재미있고, 부드럽고, 지적이고, 그러면서도 감동적이고, 윤리적이고, 무엇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로 가득했다. 나는 그 교감의 촉수가 내게도 뻗치기를 바랐다. 그의 뒤를 따라 글로써 진리와 아름다움, 정의로움 같은 위대한 가치들을 실현하고 싶었다. 그야말로 혼자서 랄라랜드(La la land)에 살고 있었던 거다. 환상이 깨지고 내 처지를 실감했을 때는 다행히도 이미 그에게서 벗어난 후였다.
그는 연구와 집필, 대중강연이 특기면서 동시에 인신공격이 취미였다. 처음엔 그저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아니겠는가, 하고 넘겨보려 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딘가 흥미로운 구석을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반복되는 인신공격이 흥미로울리는 없었다. 공격 대상은 무한대였다. 누구에게나 공격을 서슴지 않으니 내게 해도 별반 영향이 없을 거라고 믿었지만, 천만의 말씀. 신선하리만치 쨍, 하고 가슴을 후벼팠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느덧 의심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쓴 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서늘한 생각이 마침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만 것이다.
자기가 쓴 글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나? 글이라는 건 그 사람의 내부에서 나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자기 안에 없는 걸 끄집어낼수도 있는 건가? 아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너무 용을 쓴 나머지 인간적으로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건가? 사실 원래는 퍽 좋은 사람이었는데, 좋은 글을 쓴다고 칭송받은 게 지나쳐 그만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건가?
복잡하게 파고드는 건 딱 질색인 성향 덕으로, 생각이 더 꼬여버리기 전에 그에게서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나마 천운이었다. 좋은 글 쓰는 법은 끝내 못 배웠지만, 더는 인신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타고나기를 '여장부'는 못되는 것 같다. 하지만 위험을 감지했을 때 한 발 물러서 스스로를 단단히 지키는 일은 여장부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최근 답답하던 심정을 깔쌈하게 정리하도록 도와준 사람이 한 명 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다. 그녀는 아이디어가 마치 신의 계시처럼 그것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려온다(강림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는 메시지, 작가는 메신저인 셈이다. 그녀의 말대로 메시지와 메신저가 애초에 서로 분리된 존재라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욘 없다. 같은 논리로 나쁜 글을 쓰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리란 법도 없다. 글은 글이고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글은 사람보다 유리한 입지에 있다. 고칠 수가 있으니까.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계속. 무한대로. 몇 번이고 자르고, 붙이고, 늘이고, 줄이고, 바꾸고, 없애고, 새로 끼웠다가 또 다시 빼고... 사람도 물론 고칠 수야 있다. 그런데 훨씬 손이 많이 간다. 그것도 남이 해주길 기다리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오랜 시간에 걸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심지어 그 변화가 잘 고친 글만큼이나 극적으로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글이 발전하는 속도와 사람이 발전하는 속도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아니, 글은 발전해도 사람은 도리어 퇴보하는 웃지못할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등골이 싸해졌다. 나는 내 글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정성들여 나 자신을 고치면서 살고 있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