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프로를 대체로 좋아한다. 최근 그가 나오던 프로그램 중 하나에서 사건이 발생해 사회갈등이 매우 심했다. 나는 가족 내 성폭력 당사자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이 사건에 너무 과도한 호기심을 갖는 걸 부러 피했다. 친족성폭력 피해 관련 영화, 뉴스 보도, 칼럼 등은 내겐 마치 '비상 알람 버튼' 같은 것이어서, 구태여 스스로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멀리하는 편이다. 꽤 문제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었음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뿔난 여론이 잠잠해지고, 오은영 박사도 여전히 TV에 나와 상담을 이어간다. 나는 오은영 박사가 좋다, 싫다, 어떻다는 논쟁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있는 건 '상담' 그 자체다.
지역에서 주관하는 무료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담당 선생님은 서글서글하면서도 따뜻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여성분이었다. 처음으로 받는 상담에 자못 신이 난 나는 입에 부스터가 달린 것처럼 그간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상담 몇 주 차가 되도록 입을 좀처럼 열지 않아 상담사들이 가슴을 치기도 한다는데, 나는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주체할 수 없는 수다쟁이가 되어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에겐 애써 조심하며 늘 '필터링' 해야만 했던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앞에 앉은 이 분에게만은 모조리 털어놓아도 될 거란 깊은 안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하면서도 뭔가 석연찮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울그락불그락 해졌기 때문이다. 뭔가 잘못된 건가 싶었지만 시작한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야겠다 싶어 기어이 끝까지 다 말해 버렸다. 짧은 침묵. 그녀는 이미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본 건 '경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아...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사람에게?"
첫 시간을 끝으로 나는 기관에 상담을 받지 않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담당자와 상담사는 당황해서 수차례 연락이 왔지만,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위 상담사가 한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괜찮다. 어떤 말에 대한 해석과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겐 그 어떤 말보다도 충격적인 한 마디였다. 그 뒤 우연히 또 기회(aka 시간과 돈)가 생겨 이번에는 사설 기관에서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이 또한 애석하게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도 돈, 둘째도 돈이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한 회당 10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몇 달, 몇 년씩이나 지불할만한 경제력이 내게는 없었다. 상담의 질은? 처음에 받았던(당했던) 상담에 비하면 그 가치를 논할 수 없을만큼 값진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나는 안방에서 오은영 박사의 상담 장면을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오은영 박사 이전에, 내게는 '칼 로저스'가 있었다.
'칼 로저스'는 미국의 유명한 교육/심리/상담학자다. 그는 '인간중심 상담기법'으로 유명한데, 한 마디로 사람이 주인이 되는 상담기법이다. 내담자에게 이것 저것을 명령하듯 지시하며 내담자의 현실을 바꾸려고 억지를 부리는 상담이 아닌, 내담자의 상황과 맥락에서 그 또는 그녀를 진심으로 수용하고 인간적으로 이해하며 상담자 역시 내담자와 함께 열린 마음으로 성장하는, 그런 상담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알코올 중독 문제로 내담했다고 하자. 상담자가 칼 로저스라면 다음과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문제가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우리 사회의 해악입니다." "당장 내일부터 금주하고, 내가 지시하는대로 계속 따라오세요. 변화가 있을 겁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술을 통해 당신이 얻는 기쁨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삶에 술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혹시 술로 인해, 포기하거나 잃어버려야 했던 소중한 존재가 있나요? 괜찮다면 얘기해줄래요?" 칼 로저스의 상담기법은 상담학계는 물론 교육분야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의 저서 <학습의 자유>를 읽어보면, 그러지 않을 수 없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위대한 학자는 기껏해야 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으니,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도움이 절실한 내게 뜻밖의 인물이 여태껏 최고의 상담사가 되어주었다. 바로 내 동생이다.
이 친구의 상담기법은 딱히 없다. 기법은 고사하고 엄밀히 말해 상담사 자격증도, 관련 지식도 전무하다. 하지만 내 동생만의 강점이 하나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못할거라 감히 자부한다. 다름 아닌 '듣기' 실력이다. 국어듣기평가에선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던 내 동생은 신기하게도 현실 대화 속에서는 듣기의 화신이 되어 활약 중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80퍼센트는 내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나뿐이 아니라 다른 식구들, 친척들, 그애의 친구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현상(?)이다. 그런데 상대가 80퍼센트나 말하게 내버려두고 자기는 고작 20퍼센트밖에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면에서는 게을러터진(?)게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예시를 들어 보인다.
소란화: 오늘, 속상한 일이 있었어.
동생: 뭔데? (아주 가볍고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톤)
소란화: 이런 사람이, 내게... 블라블라....
동생: 응. 응. 응. (계속해서 추임새 '응'을 반복한다)
소란화: 그래서... 결론은, 그 사람이 정말 나쁜 것 같아.
동생: 그랬구나. (역시 가볍고 감정 없음)
소란화: 응. 너는 어떻게 생각해?
동생: 흠... 글쎄. 참 어렵다, 그치?
소란화: 그러게. 어려워. 그래도 속상한 건 나니까 역시 내가 피해자 아닐까?
동생: 듣고보니 그런 것 같네. (약간의 친근한 음성, 동조의 목소리톤)
소란화: 들어줘서 고마워. 네 일도 바쁠텐데 방해해서 미안해.
동생: 아니, 별로 상관없어. (다시 무감정 톤으로 돌아감)
이게 뭐냐는 원성이 들려오는 것 같지만, 정말 이게 다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면 느낄 수 있다. 동생과 대화하는 건, 마치 나무나 풀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 같달까. 이렇다할 대단한 반응은 기대할 순 없지만, 대신 어떤 말을 어떻게 해도 괜찮다는 것만은 안다. '뭐야, 대나무숲 같은 거네'라고 생각했다면 정확하다. 내 동생은 대나무숲이다. 좋은 상담자는, 적어도 현재의 소란화에게 가장 좋은 상담자는, 적당한 무심함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묵묵히 받아주고 때론 반향해주고 그러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당히 무심한 상태로 돌아가는, 대나무숲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을 찾아 가출했던 아이가 집에 돌아와보니 '살아있는 부처님', 즉 자기 어머니를 발견하곤 뛸 듯이 기뻐했다는 옛날 이야기가 떠오른다. 뭐니뭐니해도 나를 제일 잘 알고 내게 든든한 아군이 되어준 건 식구들, 그 중에서도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1000배는 성숙한 내 동생이 내게는 살아있는 '칼 로저스'였다고 할까. 최고의 상담사가 TV 속이나 책 속에서만 사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