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단면보다는 양면으로 된 색종이가 좋았다. 단면은 접으면 단조로운 흰색이 힐끔, 힐끔 보여 재미가 없지만, 양면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접어도 색깔이 나타나니 다채롭고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살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은 이상하게도 단면이길 바랐다. 제발, 내가 원하는 색으로만 있어주길 바랐다고 할까. 착한 사람은 끝까지 착한 사람으로, 고장없고 쌩쌩한 물건이면 끝까지 무탈하게. 그건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였음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야옹' 소리가 들렸다. 저만치 누군가 내다버린 의자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다 순간 멈칫했다. 오. 고양이들의 동작이 어딘가 요상하다. 아......! 나는 즉시 뒤를 돌아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바보야. 훨씬 더 돌아가야 한다고.' 안다. 아는데, 어쩐지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멀리, 더 멀리 떨어져!
사랑을 나누는 두 마리 어여쁜 고양이. 내가 본 건 그저 그뿐이었는데. 왜 그렇게나 놀라고 말았을까?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다큐 프로그램에서 잊었다, 하면 나오는 장면이 바로 짝짓기하는 모습이다. 뭐가 그리 새로워 달아나듯 현장(!)을 벗어났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양이는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그런(?) 것과는 무관한 생명체라고 애써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성화, 말그대로 '무성화'된 존재로서의 고양이만 인정하고 싶었던 걸까? 덧붙여 (조금 구차하지만) 변명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이건 미디어 탓이기도 하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는 각종 고양이 짤, 밈(meme)들은 냥냥펀치, 귀엽게 야옹거리는 모습, 고양이가 집사에게 새초롬하게 구는 모습, 지나가는 아무개에게 애교부리는 모습 같은 '안전한' 장면들만 골라 전시한다. 색종이의 '단면'만 보여주는 셈이다.
그날 이후 고양이가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예전처럼 '아이구~ 우쭈쭈~ 귀여워~ 어디가~'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고양이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 땅 위에 함께 살아가는 동료 생명체로서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함부로 다가가서 겁을 주거나, 원하지도 않는 스킨십을 시도하는 등 사람에겐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단지 귀엽다는 이유로, 나보다 작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것 같았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르던 동물을 길가에 내다 버린다. 각자의 사정을 떠나 조금 거칠게 일반화를 해보자면, 아마 이들은 자기네 강아지나 고양이, 토끼나 햄스터가 단 한 가지 모습만 보여주리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건강함, 귀여움, 사랑스러움, 애교, 친화력, 순종, 적응, 그리고 '말썽 부리지 않음.'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짧지 않은 생애 동안 아주 많은 굴곡을 거치기 마련이다. 아프거나, 야생의 욕망이 끓어오르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애석하게도 인간을 싫어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성격이 굳어지거나. 단면인줄 알고 '구매'했던 색종이를 뒤집어보니, 떡하니 다른 색이 나왔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양면 색종이같은 동물 식구를 '처분'해 버린다. 그렇다면 나는? 물론 내게는 고양이도 강아지도 기니피그도 물고기도 없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도 고양이는 '온 세상 귀여움의 집합체 단지 그뿐'이라는 위험천만한 생각에 휩싸여 있던 내가, 이런 매정한 사람들과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심각한 사색이 무색하게 나는 오늘도 (나를 위해 유튜브 알고리듬이 신중하게 엄선한) 각종 고양이 짤과 영상을 보며 태연히 즐거워한다. 나야말로 양면 색종이의 끝판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