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화 Feb 20. 2023

늘 입는 거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는 항상 빨간 스웨터와 노란 반바지를 입고 다닌다. 잠옷도 늘 같은 종류다. 앙드레 김 디자이너도 생전에 늘 하얀 옷만 입으셨다 한다. 나는 짱구도 앙드레 김 선생님도 아니지만 어쩐지 늘 같은 옷을 찾아 입게 된다. 그건 내게 그럴듯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일상의 편의를 위해서다. (그러고 보니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까만 스웨터와 청바지만 입었고, 마크 저커버그도 하얀 티셔츠에 진 차림으로 유명하다.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거란 생각이다. 어쩌다 백화점이나 몰에 가보면 엄청나게 화려하고 근사한 옷들은 보통 마네킹이 입고 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차림이다. 손에 든 쇼핑백에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근사한 옷들이 들어 있겠지만 나는 그것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 사라고 만든 옷들인데 막상 사놓고 옷장에 넣어 놓는 사람들.


사치스럽거나 허영기 가득해서가 아니다. 큰맘 먹고 '질렀지만' 그 '큰맘' 때문에 옷장에 고이 모셔두기로 한 것이다. 옷장에 모셔두는 이유는 아깝다, 귀한 옷이니 특별한 날에만 꺼내 입겠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불편'하기 때문 아닐까. 새 것은 불편하다. 말캉말캉하고 부드러운 몸을 애써 빳빳한 형태와 서늘한 천에 적응시켜야 한다. 사람은 항상성의 동물이라 웬만해선 비슷한 느낌을 좇는다. 늘 입던 그것에 어김없이 손이 가게 되는 매커니즘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늘 입는 옷의 기준은 단순하다. 목이든 허리든 신체 어느 곳이든 조이거나 압박하면 광속 탈락.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3초 이상 쳐다볼 정도로 개성적이라면 역시 광속 탈락. 너무 신경을 안 썼다거나 지나치게 '집' 스러운 분위기의 옷이라면 또 탈락.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고집하는, 나만의 '시밀러룩'이 완성되는 초간단 기준들이다.


늘 입는 것만 입다보니 고민이 생긴다. 대체 옷장 정리는 왜 하는 걸까. 어차피 늘 같은 것만 입을 거면서, 철따라 옷을 꺼냈다 넣었다 접었다 폈다 하는 모든 과정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새로 마음 먹고 입지 않던 옷들을 본격적으로 입어보려 하지만,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 입을 옷을 고민하는 시간은 어쩐지 불안감을 일으킨다. 오늘의 나에게 어울리는 건 어떤 색일까. 어떤 질감일까. 어떤 모양일까. 하루가 어떻게 펼쳐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에게 어울리는 걸 미리 알 수 있을까. 그냥 입던 걸 입으면, 내게 지극히 익숙한 바로 그 느낌 그대로의 하루가 펼쳐지지 않을까. 모든 것이 무사한, 고만고만하고도 안온한 그제와 어제 같은 오늘.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비슷하다면 대체 인생은 왜 살려고 하는 걸까. 똑같은 하루를 365번 반복하고 내년에도 똑같이 365일을 반복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 눈에 띄지 않기. 남 신경 거스르지 않기. 평범해 보이기. 개성 감추기. 시도하지 않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고 삐까뻔적(?)한 옷을 입어야만 비로소 재미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관성'에 대한 성찰이다. 불편하고 낯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그것을 핑계로 끊임없이 도망치고 주저앉는 마음의 게으른 습성에 대한 이야기다. 편하고 안전한 것이 꼭 '나'다운 건 아니다. 불편하고 위험한 것들도 '나'가 될 수 있다. 예전의 나는 사회가 정해준 '나이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문자그대로 '죽는' 건 줄 알았다. 20대에 직장을 찾아서 30대에 커리어를 착실히 쌓고 40이 되기 전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파트너를 찾아 결혼을 해야 하며 아이도 하나쯤은 가져야 한다 등등... 그런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런 스크립트에서 벗어나고 보니 그렇지 못한 나, 주어진 나이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 나도 충분히 '나'가 될 수 있는 거였다. 편하고 안전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꼭 맞는 옷, 내가 매일같이 '입어야만' 하는 옷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조차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게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믿는 게 좋을 거다'라고 집요하게 '협박(흔히 "교육"이라는 말로 퉁쳐진다)'해온 결과일지 모른다.


어떤 학자가 그랬다. 시도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할 때 엄습하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의 원시적인 '파충류' 뇌에서 나오는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반응일 뿐, 실상은 그다지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파충류 뇌 따위에 지긴 좀 억울하니까 다시 해보려 한다. 매일 같은 옷으로 향하는 몸과 마음을 돌이켜 조금씩 다른 시도들을 감행하는 거다. 그정도의 용기와 창의력(?)은 발휘해봄직 하다. 일단 이 헐렁한 스웨터와는 내일부터 (잠시) 이별이다.



*붙이는 말: 어찌보면 참 팔자도 늘어진 소리다. 입을 옷이 없는 사람은 국내에도 차고 넘칠뿐 아니라, 각종 자연재해로 인해 일상이 무너져 옷은커녕 덮을 이불도 한 장 없는 국외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최소한 있는 옷이라도 제대로 입으려 한다. 더 이상 '입을 옷 없다'는 천벌 받을 소리는 감히 입밖에도 내지 않으려 한다. 입을 옷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옷을 제대로 입을 깡이 없었던거다.




작가의 이전글 구구의 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