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는 어디에나 있다. 아파트 단지에도, 상가 근처에도, 사거리에도, 도로에도, 공원 잔디에도, 전봇대에도, 버스정류장에도, 심지어 실외기 위에도. 너무 흔해서 새로울 것도 없다. 이따금 보이는 새하얀 비둘기는 '예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잠시뿐이다. 비둘기는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만인에게 사랑받는 동물은 아니다.
오래 전 친구와 함께 거리를 지나다 보도블럭 위에 인형처럼 가만히 엎드려있는 비둘기를 보았다. 웬만큼 가까워지면 슬금슬금 도망칠법도 한데 영 꼼짝을 않길래 신기해서 좀더 바짝 다가갔다. 화들짝 놀라 비명이 절로 나왔다. 비둘기의 꼬랑지 부분이 완전히 잘려나가 있었다. 자를 대고 자르기라도 한 것처럼 상처부위가 완벽한 '일'자 형태였다. 잘린 부분 아래로 시뻘건 피부와 근육이 다 드러나보였고 피가 콸콸 새어나온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바들바들 떠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었다. 문득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위나 칼을 댄게 아니라면 저렇게 다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하지만, 만일 고양이가 발톱으로 혼쭐을 냈거나 강아지가 물었거나 동종 새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면 그렇게까지 정교한 '일'자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이후로 내 근처를 지나가는 비둘기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제법 많은 녀석들이 발에 상처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발가락이 아예 뭉텅이로 잘려나간 개체도 왕왕 있었다. 바퀴에 깔리거나 도로 하수구 철망에 찝혔던 흔적들일까. 그렇게 상처나거나 불구가 된 발을 하고 자전거 곁으로든 트럭 아래로든 뽈뽈 잘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비둘기들의 왕성한 생명력과 밑도 끝도 없는 무대포 정신(?)에 새삼 경이로웠다. 자기 몸의 수백배는 될 법한 차들이 씽씽 지나가는 도로 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표정으로 '걸어서' 지나다니는 것들의 담력이란 대체 얼만큼 무지막지한 걸까. 원래부터 그런 '용맹한(!)' 개체였던 걸까, 아니면 인간세상에서 억지로 살아내려 하다보니 어느새 그처럼 단단한 평상심을 갖게 된 걸까.
나는 비둘기에게 이렇다할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최소한 그들이 쓸데없는 미움은 받지 않았으면 한다. 예전에 '비둘기 혐오'가 꽤 팽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뚱뚱하고 멍청하다 해서 비둘기들이 으레 '닭둘기'라고 불렸다. 지나가는 비둘기들을 보고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치게 혐오하는 제스처를 해보여도 사람들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비둘기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온상,' '지나치게 번식하는 문제종' 등 위생적인 면에 있어서 인식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새라면 일단 피하고 보는 조류 포비아도 한몫 했을 것이다. 새를 무서워하는 건 타고난 성향이든 후천적인 트라우마든 그 자체로는 아무 잘못이 없다. 하지만 정말로 새가 무섭다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면 될 일이다. 대놓고 비명을 내지르거나(대체 왜?) 겁을 줘서 쫓아버리는 행동은 비둘기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내가 봐도 뭐랄까....... 무례하다. 인간이라고 해서 도로와 거리를 몽땅 점유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대체로 동물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비둘기는 친근하게도 '구구'라고 불린다. '구구는 새인데 왜 날지 않고 걷는지' 엄마께 집요하게 질문을 해대던 옛 기억이 여태 선명하다. 아마 그건 엄마의 이 기상천외한 대답 때문이지 싶다. '다리도 있고 날개도 있는데 저 하고픈대로 하면 되는 거지, 맨날 날아다니면 얼마나 힘들겠니.' 정말이지 엄마 말씀대로 나는 게 '고단해서' 걷는 거라면, 구구들이 최소한 멀쩡한 발로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만큼 길이 낙낙해지면 좋겠다. 피로에 지친 주홍빛 조그만 발가락 네 개 온전히 다 품어줄 만큼의 공간도 없다면 그것도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