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작되려 한다
자주 방문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적잖게 올라오는 글들의 주제가 다름 아닌 '여자로서의 인생'이다. 요지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여자로서의 인생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 슬프고 우울하다는 이야기. 나는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 사회학적 여성으로 길러진 사람으로서 곰곰 생각해본다. 여자로서의 인생이라. 보통의 글들이 말하는, 임신 및 출산 때문에 멀어져가는 여자로서의 인생이란 다름 아닌 '어리고 날씬하고 피부가 고우며 좋은 향기가 나고 사람들에게 예쁘거나 아름답다는 칭찬을 듣는' 삶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성적 매력이 충만한 인생을 뜻한다.
임신과 출산은 한 사람의 외형과 내면을 완전히 탈바꿈하는 일생일대의 경험이다. 몸은 출산 트라우마로 인해 예전과 같을 수 없고, 마음은 물론 정신까지도 아이를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 대격변을 거친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나버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애당초 여자로서의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다른 정의를 놓고 출발한다면, 임신과 출산에 대해 '여자로서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려 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성적 매력이 충만한 여자는 그렇게 보이도록 '꾸며진', '가꾸어진' 여자다. 가꾸는 건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꾸미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으며, 각고의 노력을 요한다.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여자라고 다 같은 여자가 아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여자들이 살고 있는데. 다양한 외형, 다양한 내면, 다양한 연령, 다양한 직업, 다양한 취미,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 다양한 종교만큼 다양한 여자가 있다. 그러므로 여자로서의 인생에서 '끝'이란 말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진행중인 셈이다.
아이를 낳는 여자. 아이를 갖지 않는 여자. 일과 취미, 자신만의 생활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여자. 자유롭게 여행하는 여자. 아이를 네 명 이상 낳고 기르며 육아에 전념하는 여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쉬는 여자. 매우 바쁘게 활동하는 여자. 소박한 일상에 만족하는 여자.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삶을 추구하는 여자. 지적인 가치에 가장 큰 의미를 두는 여자. 물적인 가치에 누구보다 충실한 여자. 여자로서의 인생은 이렇게나 넓고, 또한 방대하다. 여자로서의 인생에는 항상 새로운 가능성이 두근거리며 잠자고 있다.
나는 임신 후 내 몸과 마음이 거쳐온 갖은 변화들이 썩 싫지 않다. 입덧은 솔직히 즐겁진 않았지만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다. 토를 하는데 동시에 배가 고플 수도 있고, 속이 좋지 않은데 동시에 음식은 먹는 족족 잘만 소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첫 태동. 꼬물거리거나 툭툭거리거나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내 안의 작은 움직임에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설렘을 맛보았다. 엄연히 내가 아니면서 재밌게도 나와 한 몸에 공존하는,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만큼이나 너무도 친숙한 존재인 이 아가 친구에게 나는 오늘도 속삭인다. 여자로서의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너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여성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